'숯' 쓱 살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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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시인 만해 한용운 님의 시 '알 수 없어요'에는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라는 구절이 있다. 사람들은 이를 해석할 때 '역설'이라 하지만, 실제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 그것은 숯이다.

숯은 나무를 구워 만든 탄소 덩어리의 연료다. 나무를 완전히 태우는 것이 아니라 숯가마에 넣어 구워야 숯이 된다. 요즘은 숯이 가장 많이 쓰이는 곳이 고기구이 집이다. 숯불로 구운 고기가 더 맛있다. 특히 톱밥을 섞은 합성 숯이 아니라 참숯으로 구운 고기는 그윽한 향미가 있다. 하지만 숯은 이보다 훨씬 다양하게 쓰였다.

울산 태화강대공원 십리 대숲
해마다 잘라내 버리던 대나무
이젠 숯으로 변신해
기념품으로 전달되는데
인기가 대단하단다

고깃집에서나 쓰이던 숯
어느새 생활 곳곳에서
다시 부름을 받고 있다


'십리 대숲'으로 유명한 울산시 태화강대공원에는 무려 70만~80만 그루의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 매년 왕성하게 뿌리가 뻗어 나가니 이를 정리하는 것이 공원 관리자의 주된 일이다. 태화강대공원 관리사무소는 간벌하는 대나무를 일부 화단 방책 등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버리다가 멋진 착안을 했다. 버리는 대나무를 숯으로 만들 생각을 한 것이다. 대나무 숯은 탈취 효과가 뛰어나다.

일은 간단했다. 간벌한 대나무를 50㎝ 정도 크기로 미리 자른 뒤 인근 숯가마를 빌려 구워 내면 됐다. 구운 숯은 울주군 외고산 옹기마을에서 구운 옹기에 넣었다. 예쁘게 종이 포장을 해서 울산시를 방문하는 손님에게 몇 해째 선물하고 있다. 반응은 대단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구할 수 없느냐고 문의를 할 정도란다.

울산시 환경관리과 김환근 주무관은 "올해도 간벌한 대나무를 잘라 숯을 준비하고 있다"며 "대나무 숯이 인기가 좋아 올해는 옹기 디자인도 더 예쁘게 하고, 굽다가 깨진 숯도 활용하기 위해 숯주머니를 만드는 것도 계획 중"이라고 말했다.

숯은 이처럼 장식용으로도 쓰이지만 주로 주방 연료였다. 라오스나 캄보디아 등 동남아에서는 화석 연료가 귀하기에 지금도 주된 주방 연료로 숯이 쓰인다. 그런데 이웃 나라 일본의 부엌에서도 숯이 부활하고 있었다.

자급자족을 위한 적정기술을 연구하며 '근질거리는 나의 손'이라는 책을 쓴 농민 김성원 씨는 지난해 10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나는 난로다' 모임에 강사로 갔다가 일본 가정에서 숯 화로가 다양하게 쓰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행사 참가자들은 기름이나 가스가 아니라 숯과 나무를 이용해 고기를 굽고, 물을 끓이고 빵까지 구워 냈다. 숯으로 요리하니 나무 향이 그윽하게 배어 음식 맛이 더 좋은 것은 당연했다.

신라가 융성했을 때 저녁 무렵에도 서라벌의 부엌에는 연기가 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다들 귀한 숯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였기 때문이다. 이럴 때 숯은 부의 상징이었지만, 석유 등 화석연료가 개발되면서 천덕꾸러기로 바뀌고 말았다. 그런데 옛날에도 숯은 꼭 연료로 쓰인 것만은 아니었다.

간장을 담글 때 필수적으로 넣는 숯은 메주 곰팡이에서 발생하는 아플라톡신을 흡수한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됐다. 숯은 습도 조절 특성이 뛰어나 쌀독에 넣으면 쌀벌레가 잘 생기지 않는다. 물을 정화하는 정수장치에도 모래, 자갈과 함께 꼭 들어가는 것이 숯이다.

김 씨는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옛날에 숯의 용도는 무궁무진했다고 한다. 숯은 기본적으로 성냥이 없던 시절 불씨를 보관하는 재료였다. 버드나무나 사시나무, 벚나무로 만든 숯은 그림을 그리는 목탄이 되었다. 금이나 은, 칠기 등 고급 재료를 갈고 닦는 연마재로는 버드나무나 동백나무로 만든 숯이 쓰였다. 그뿐만 아니라 여인의 눈썹을 그리는 화장용으로는 오동나무 숯이 애용되었고, 탁탁 튀면서 타는 뽕나무 숯은 정월 16일 귀신을 쫓기 위한 불꽃놀이용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숯이라고 다 같은 숯이 아니다. 흔히 질이 낮은 숯은 흑탄이나 검탄이라고 부르는데 600~700도 정도로 가열한 뒤 숯가마에서 2~3일 두었다가 100도 정도로 온도가 떨어졌을 때 꺼낸 것이다. 좋기로 소문난 백탄은 800~1천300도의 높은 온도로 가열한 뒤 바로 꺼내어 흙·재·숯불이 섞인 가루를 덮어 재빨리 식힌 것으로 탄소 함유 비율이 높아 열효율이 높다. 백탄은 두드리면 '깡깡깡' 쇳소리가 난다.

시중에 나도는 숯은 중국산인 경우가 많은데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참숯이나 대나무 숯을 직접 만들기도 한다. 공기가 희박한 곳에서 목재를 가열하면 탄화(숯)가 되기 시작하는데 드럼통을 흙에 묻어 간이 가마를 만들어 숯을 구워 내는 방식이다.

숯에는 눈에 보이지 않은 수많은 공기주머니가 있어 유기물 분해력이 뛰어난 방선균이 잘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에는 탈취제로 주목을 받고 있다.

숯의 향취에 착안해 커피콩을 볶을 때도 숯만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숯 예찬론자 김 씨는 "숯으로 볶은 커피콩으로 내린 커피를 마시면 입안에 비단 물결이 흐르는 듯하다"고 감탄했다.

숯가루로 팩을 한 뒤 숯비누로 세수를 하고, 숯으로 만든 그릇으로 밥을 먹고, 숯칫솔로 양치를 하고 숯침대에서 잠도 잔다. 숯이 이렇듯 생활 속으로 성큼 들어와 있으니 '숯의 부활'이 맞다.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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