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 - 동네 이발소] 오늘도 문을 연다 한 명이 찾더라도…
입력 : 2016-10-30 19:06:39 수정 : 2016-11-01 11:53:44
이발 의자 고작 두 개, 세면대 하나. 57년 동안 직장이자 삶의 터전인 신안이용원 좁은 공간에서 신동철 사장이 이발 가위를 들고 손님의 머리를 다듬고 있다. 이발소는 미용실에 밀려 점점 사라지는 추세다.그 남자의 손길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가 손가락으로 인중 부근의 윗입술을 집어 들어 올렸을 때는 살짝 부끄럽기도 했다. 그의 칼이 턱과 관자놀이 아래를 지날 때는 개운하고 시원했다. 마침내 뜨거운 수건이 얼굴을 덮었다. 따뜻함과 나른함에 깜박 잠이 들 뻔했다. 눈을 뜨니 온화한 얼굴의 할아버지가 엷은 미소를 띠고 내려다본다. "면도가 끝났습니다. 깊게 하지 않았어요. 피부가 상할 수도 있으니까요.' 57년 경력 이용사인 부산 서구 아미동 신안이용원 신동철(75) 사장이다.
신 사장이 물었다. "기자는 이발을 어디서 합니까?" "저~ 미용원에 갑니다." 대답을 하고 보니 좀 미안했다. 이발소는 발은 끊은 지 꽤 오래다. '이발소 몰락 사태'의 공범이 된 기분이다.
부산에만 3000곳 달하던 '사랑방'
골목골목 들어선 미용실 성장 밀려
지금은 동네에서 한 곳 찾기 힘들어
비석마을 '신안이용원' 신동철 사장
하루 손님 다섯 명도 채 안 되지만
"간혹 찾는 단골 헛걸음 시켜서야…"
이발소는 남자의 머리털을 깎거나 염색, 면도하는 곳. 이용원이나 이발관으로도 부른다. 1540년 파리의 한 이발소에서 적색·백색·청색 간판을 처음 썼다고 한다. 당시엔 이발소가 외과병원을 겸했다. 우리나라는 1895년(고종 32년)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남자의 이발이 시작되었다. 당시 고종이 머리를 짧게 깎았는데 우리나라 이발 1호인 셈이다.
아미동 비석마을에 있는 신안이용원은 한자리를 60년 넘어 지켜왔다. 신 사장은 이 이발소에 종업원으로 들어왔다가 주인이 되었다. 신 사장의 집은 아미동 이웃 동네인 감천마을. 아버지가 태극교도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14살 때 경북 상주에서 이사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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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이발소에서만 할 수 있는 유료 면도. |
어려운 가정 형편에 중학교 진학은 언감생심. 부평동 복개천 개다리 부근에서 신문팔이, 여름이면 '아이스케키' 장사 등 온갖 일을 다 했다. 참기름 행상을 하던 어머니가 신안이용원 주문갑 사장이 종업원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와서 이발 기술을 배우라고 했다.
당시 이발 기술은 양복 기술과 더불어 선망의 대상이었다. 33㎡도 안 되는 작은 이발소에서 사장과 종업원 등 모두 4명이 일했다. 처음 1년은 청소만 했다. 그다음엔 머리를 감기는 일을 했고, 어깨너머로 면도와 이발 기술을 배웠다. 4년이 지나서야 겨우 가위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인아저씨가 돌아가셨다. 부랴부랴 이용사 면허를 땄다. 24살 때다. 주인아주머니가 일을 도와주시는 등 힘을 합하여 이발소를 꾸려나갈 수 있었다. 삼촌이라며 따르던 주인집 아이들도 다들 곱게 자랐다. 큰아들은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화장품 회사의 대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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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햇볕에 바싹 말리고 있는 이발용 수건. |
가게의 중심이던 주인아주머니도 발을 다쳐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이때부터 온전히 신안이용원을 맡았다. 26살에 결혼을 했다. 태극도마을 바로 윗집에 살던 고순자(72) 여사다. 아래윗집에 살았지만 혼인할 때까지 서로 얼굴도 몰랐다고 했다. 아들딸 다섯을 낳았다. 부모님과 동생들까지 열 식구가 이발소에 목을 맸다.
날이 새면 문을 열고, 일요일도 없이 저녁 늦게까지 일했다. 당시엔 그래도 손님이 많았다. 워낙 식구가 많아 버는 돈이 다 들어갔지만, 그래도 이발소가 있었기에 아들딸 잘 키우며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위기가 닥쳤다. 90년대 들어서면서 미장원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퇴폐 영업을 하는 이발소가 기사가 신문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퇴폐라 카니까, 우리는 안 그런데도 아줌마들이 아저씨 손목을 끌고 다들 미장원으로 가 뿌더라. 그 바람에 손님이 팍팍 줄었지." 하루 최고 30명까지 오던 손님이 지금은 채 5명도 안 된다. 우여곡절이 있었어도 그동안 아들딸 잘 키운 것은 보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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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철 사장이 51년 전에 취득한 이용사 면허증. |
이발소의 몰락과 미용원(미장원)의 성세는 수치로도 분명했다. 한국이용사회 부산시협의회 허재도 사무국장은 "2000년대 초만 하더라도 3000개에 육박해 동네 골목마다 존재하던 이발소가 지금은 한 동네에서 하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 사이 2010년 기준 7340개이던 미용원은 2016년 초 9076개로 급증했다.
"너무 옛날 기술에만 의지하고, 기술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했지요. 투자도 않았는데 미용실은 날로 발전하고요." 허 사무국장은 이발소가 줄어든 것은 이런 복합적인 원인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발소는 '이발기계와 가위'를 미용원이 사용하는 문제로 법적 다툼까지 하며 업종 경쟁을 했지만, 시대의 흐름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는 분들은 꾸준하게 오십니다." 신안이용원에는 30년 된 단골도 있다고 했다. 영도나 다대포로 이사했는데도 매달 이곳에 와서 이발하는 사람들도 있단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음에 드는 헤어스타일은 아무 데서나 구현할 수 없고, 1시간 정도 이발과 면도를 정성껏 하는 신 사장의 솜씨를 못 잊어서이다.
젊은 이용사는 극히 드물다. 부산 이용사 평균 연령이 60~70대로 고령이지만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이 많다. 서구 '화이봉회' 10여 명의 이용사는 화요일마다 경로당 등을 찾아 이발 봉사를 하는데 벌써 39년째다. 신 사장도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알림이로 활약하고 있다. 서울 중심가에 있다는 비싼 예약제 고급 이발소가 미래의 대안일 수도 있지만, 점점 사라져 가더라도 동네 이발소와 이용사의 정겨움은 이후로도 오래 남을 것이다.
글=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사진=김경현 기자 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