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리 뉴스] 해방 이듬해 부산 쑥대밭 만든 전염병, '호열자'를 아시나예?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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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해방 뒤에 선박으로 부산항에 들어온 해외 동포들이 방역 소독을 받고 있는 모습이라예.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945년 8월 15일 해방 뒤에 선박으로 부산항에 들어온 해외 동포들이 방역 소독을 받고 있는 모습이라예.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읽기 전 잠깐] 우리 생활과 밀접한 데이터와 스토리를 접목해 재미와 정보를 동시에 전달하고자 친근한 경상도 사투리로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글을 읽다가 이해가 안 되는 사투리가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친절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21세기에 전염병이 우짠 일이고. 옛날에 '호열자(虎列刺)' 돌던 시절도 아이고, 참말로…"

"호열자예? 호열자가 뭔가예?"

"니는 기자면서도 호열자가 뭔지도 모르나?"

요즘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니까, 어르신들 기억에 있던 전염병들이 한목에 다 튀나오는가 봅니더. 저희 어머니 기억 속에 있는 가장 쎈 전염병이 이 호열자, 바로 '콜레라'였다 카데예.

호열자는 호랑이가 몸을 찢는 것처럼 통증이 어마어마해가 붙인 이름인데, 그래서 '호역(虎疫)'이라고도 합니더. 이 콜레라는예, 한 번 걸리면 구토도 나오고예, 설사가 좔좔 나와서 탈수 현상까지 나타나고 결국엔 삐짝 곯아가 죽을 수도 있답니더. 다른 전염병도 그렇겠지만예, 이 콜레라는 정말로 인간의 '존엄성 1'도 지켜주지 않는 더러운 질병이기도 합니더.

그런데 해방 이듬해 1946년부터 부산이 바로 이 콜레라의 온상이 됐다는 거 알고 계십니꺼?


■동포 귀환선, 부산항 앞바다서 둥둥



1945년 해방 직후 부산항 부산세관 앞에서 귀환 동포들이 모여 있는 모습입니더. 부산시 제공 1945년 해방 직후 부산항 부산세관 앞에서 귀환 동포들이 모여 있는 모습입니더. 부산시 제공

항구 도시 부산은예, 해방 뒤부터 해외에서 동포들이 배를 타고 돌아오던 귀환 통로였심더. 일본에 있던 동포들이예, 시모노세키, 센자키, 하카타, 사세보, 마이즈루에서 연락선 타고 처음으로 밟은 고국 땅이 바로 부산항 1부두인 거라예. 그 모진 고통 다 견디고 집에 오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심꺼.

일본 정부 자료에는 1944년 말에 일본에 있던 동포 수가 193만 6843명입니더. 1947년 9월 일본 내무성의 조사에는 재일 동포 수가 총 52만 9907명이거든예. 대략 140만 동포가 해방 직후 일본서 돌아왔다고 볼 수 있을낍니더.

그런데 이 귀환 동포들을 따라 콜레라까지 같이 온 거지예. 당시 <동아일보> 보도를 보면 1946년 5월에 중국 남부에서 귀환한 수송선에 동포 3150명이 타고 있었는데, 배 안에서 고마 콜레라가 돌아뿠어예. 이미 사망자 두 명이 발생해서 시신을 바다에 그냥 버리는 처참한 일도 발생했고예. 배가 입항도 못하고 일주일 동안 부산항 앞바다서 둥둥 떠다녔다고 합니더.



일본의 패전 뒤 귀환한 동포들이 타고 온 귀국선이 뒤에 보입니더.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일본의 패전 뒤 귀환한 동포들이 타고 온 귀국선이 뒤에 보입니더.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이 신문 표현대로 '자나 깨나 해방된 조국 산천을 그리며 멀리 해남도 남지나에 가 있든 3150명의 동포들'이 손 내밀면 잡힐 것 같은 고국 땅을 눈 앞에 두고 얼마나 비통해 했을까예.

안타깝게도 부산에는 이 때부터 콜레라 환자가 억수로 쏟아집니더. 그해 5월 28일 자 신문에는예, 부산에 콜레라 확진자 87명이 발생하고 25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합니더. 특히 초량동 일대 피해가 심각했다네예. 같은 해 9월 17일 자 기사를 보면예, 부산 콜레라 환자가 564명이고 그 중 172명이 유명을 달리했심더. 전국적으로는 38선 이남 지역에서 5월부터 10월 중순까지 1만 4909명이 콜레라에 걸렸고, 그중 9632명이 목숨을 잃었지예.

당시 미군정청 시절이라서 우리는 방역도 주체적으로 할 수 없었던 속터지는 시절이였지예. 미군들이 자국민 대하듯 우리 국민들을 콜레라로부터 살뜰하게 보살폈을까예? 그라고 당시 치료약도 제대로 구비돼 있었겠습니꺼. 아마 대다수 국민들은 콜레라 걸리면 100% 죽는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조심할 수밖에 없었을낍니더.


■콜레라 격리병사에 사망자 해골이


<부산일보> 1949년 9월 10일 자 2면에는 <부산일보> 1949년 9월 10일 자 2면에는 "콜레라 예방주사를 맞지 않으면 처벌한다"는 기사가 실렸슴더. 부산일보DB

1946년에 9월 10일에 창간된 <부산일보>도 그때 부산의 콜레라 전파 상황을 상세히 보도하고 있심더. 1946년 9월 10일 자 2면에는 '호역예방주사 미실시자는 처벌'이라는 기사가 실렸네예.

"부립병원 격리실에 입원된 호열자 환자 중 주사를 맞지 않은 사람이 많은 것에 비춰 도 방역본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의를 환기하는 동시에 도민의 협력을 요망하고 있다. 금후 주사를 맞지 않은 사람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처벌할 것이니 도민 여러분은 항상 주의와 협력을 요망하야 마지 않는다." 그런데 예방주사를 맞고 싶어도 충분하지 않았고예, 시골에선 구경도 못했다니 서민들도 답답했을 낍니더.



<부산일보> 1949년 4월 2일 자 2면에 실린 기사임더. 격리병사에 콜레라 사망자 해골이 방치돼 있는 비참한 상황을 전달하고 있네예. 부산일보DB <부산일보> 1949년 4월 2일 자 2면에 실린 기사임더. 격리병사에 콜레라 사망자 해골이 방치돼 있는 비참한 상황을 전달하고 있네예. 부산일보DB

콜레라의 참상을 보여주는 기사도 하나 소개해드리께예. <부산일보> 1949년 4월 2일 자 2면 '500주의 해골, 격리병사에 방치' 기사는 제목부터 충격적입니더.

기사 내용을 자세히 보니까네, 격리시설에서 4년 전에 콜레라로 사망한 환자들의 해골 수백 기가 방치돼 골치라고 합니더. 1946년 5월부터 콜레라 사망자가 속출했는데예, 이 때 숨진 사람 1만 명이 부립(府立) 화장장에서 화장된 다음에 연고자가 유해를 찾아갔심더. 그런데 일부 주민들은 콜레라에 감염될까봐 유해를 찾아가지도 못했다 아입니꺼. 그래서 우짤 수 없어가지고 부산부가 남은 유해를 부립병원 격리병사에 안치했다네예. 당시 부산 부립병원은 지금 서구 아미동 부산대병원 자리에 있었답니더.

그런데 마 환절기 지나서 콜레라 환자가 나날이 불어나니까, 병원에 있는 해골 때매 산 사람을 수용하는데 지장을 줬다 안캅니까. 그동안 부산부가 유족들 독촉해서 해골 500기는 찾아가도록 했다고 하는데, 그래도 일부가 여전히 남아서 난감한 처지였다고 기사는 전합니더. 죽은 다음에도 가족과 상봉조차 못하게 만든 콜레라는 그때 우리 할배, 할매들을 이리 비참하게 만들었심더.


■70년 전 콜레라와 오늘의 코로나19, 그 묘한 기시감

근데 와 이렇게 70년도 더 된 케케묵은 일을 끄집어내냐고예? 보이소. 그때 상황하고 요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된 코로나19하고 묘하게 닮은 점이 있심더.

일단은 그때 콜레라가예, 외국에서 들어온 우리 동포들부터 시작된 거 아이겠슴꺼. 지금 함 보이소. 국내에서 신천지 신도들 중심으로 퍼진 코로나19의 큰 불줄기는 일단 잡았심더. 그런데 해외에서 들어오는 국민들 중에서 확진자가 쏟아지고 있는 게 그때와 비슷하지예?

그라고 또 함 보이소. 1946년에 동포들이 귀국할 때 타고 왔던 배가 전염병 때매 들어오도 못하고 바다 위에 둥둥 떠 있지 않았습니꺼. 올 2월에 일본 요코하마항에서 유람선 ‘다이아몬드프린세스’호에 코로나19 확진자가 생기자 한동안 해상에서 격리됐던 거도 비슷하지예?


지난달 25일 <부산일보> 4면에 난 광고라예. 6·25 전쟁 때 부산 시민들이 피란민에게 베풀어 준 호의에 대해 감사해 피란민의 후손이 올린 광고인데, 국난극복의 정신이 바로 이런 부산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 씀씀이 아이겠심꺼. 부산일보DB 지난달 25일 <부산일보> 4면에 난 광고라예. 6·25 전쟁 때 부산 시민들이 피란민에게 베풀어 준 호의에 대해 감사해 피란민의 후손이 올린 광고인데, 국난극복의 정신이 바로 이런 부산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 씀씀이 아이겠심꺼. 부산일보DB

“외국에서 계속 살지 만다고 들어와서 전염병을 퍼뜨리노?”

1946년 당시 원래 부산에 살던 시민이라면 이런 생각을 할 법도 합니더. 그런데예, 부산 사람들이 팻말 들고 1부두로 몰리가가 "귀환 동포 입국 반대한다"는 시위를 벌였다는 기록은 찾아보지 못했심더.

한 번 걸리면 죽을지도 모르는 전염병인데, 와 안 불안했겠습니꺼. 그래도 부산 사람들은 외국에서 모진 고생 다 하고 집에 온 사람들을 내치지 않았습니더. 이런 부산 사람들의 따신 맘 씀씀이는예, 6.25 전쟁 때도 발현돼 전국의 피란민들을 거둬들인다 아입니꺼.

누구는 그러더라고예. 우리 국민들의 취미는 ‘국난 극복’이라고예. 어마무시한 전염병이 돌아 내가 죽을 수 있다케도, 이웃과 역경을 이겨내려는 부산 사람들이 국난 극복의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입니꺼.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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