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男걷는女] 하늘 아래 첫 시장…끝 모를 길 따라 오늘도 걸어가네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 이재화기자 jhlee@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 김보경기자 harufor@busan.com , 진유민 jmin@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SNS 독자 추천 '부산포 개항가도' 걷기
끝없이 이어진 계단, 그 끝에 '성북시장'
손님 발길 줄자 '웹툰시장' 새 길 모색 중
사람 떠난 '좌천아파트' 길 끝엔 무엇이…

걸어야 보이고, 걸어야 느껴집니다. 부산을 제대로 보기 위해 운동화 끈을 동여맵니다.

진 땅이든 마른 땅이든, 까꼬막이든 계단이든, 어디든 가겠습니다. 걸어서 부산 속으로. 저는 '걷는 여자'입니다.


<이 길의 끝은 어딜까> -체험기-

2년 전까지만 해도 ‘뚜벅이’. 차를 산 뒤론 10분 거리도 잘 걷지 않는다. 하지만 더 넓게, 더 깊게 보기 위해 또다시 걷는다. ‘본캐’는 기자. 2주에 한 번씩 ‘부캐’ 뚜벅율(이하 ‘율’)이 되기로 했다.

두 번째 걸을 장소는 좌천역~좌천아파트~성북전통시장이다. 첫 기사가 나간 뒤, <부산일보> SNS에 댓글이 달렸다. ‘좌천역에서 증산공원까지 도전해보시죠’. 인터넷 지도를 켜보니, 직선거리로 350m도 되지 않는 거리. 그런데 경사형 엘리베이터가 3분의 1을 차지했다. 그 말인 즉 ‘죽음의 경사’라는 뜻.

좌천역 3번 출구 근처 ‘부산포 개항가도’ 안내판에서 첫발을 뗐다. 개항가도를 따라가면 부산진일신여학교 기념관을 지나가지만, PD들은 경사가 더 가파른 샛길로 율을 이끌었다. 안용복기념부산포개항문화관 주차장에는 건물 내부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있다는 안내가 있었지만…. 엘리베이터 타는 여자가 아니라 걷는 여자이지 않은가. 율은 체념하고 계단 지옥으로 들어섰다.

제일아파트 사이 경사형 엘리베이터에 다다르자 ‘엘리베이터 찬스’를 주는 제작진. 말이 바뀔세라, 율은 얼른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기쁨도 잠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또 다른 엘리베이터와 경사가 어마어마한 계단이 율을 기다리고 있다. 제작진은 얼른 올라가라는 듯 고개를 ‘까딱’한다. 나무 덱으로 된 계단을 오르니 흡사 등산하는 느낌. 계단은 오르고 올라도 끝이 없다.

율의 머릿속엔 어릴 적 자주 듣던, 가수 지오디의 '길'이란 노래가 맴돌았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율은 좌천아파트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을 오르며, 이 계단을 추천해준 구독자에게 ‘존경심’을 표한다. 분명 계단을 걸어봤으니, 얼마나 힘든지 알고 추천해준 걸 테다.


부산 동구 좌천동에 설치된 경사형 엘리베이터 옆 계단을 오르는 율. 계단을 한참을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3분의 2지점이었다. 정수원 PD 부산 동구 좌천동에 설치된 경사형 엘리베이터 옆 계단을 오르는 율. 계단을 한참을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3분의 2지점이었다. 정수원 PD

드디어 만난 평지. 곳곳이 갈라지고 페인트가 벗겨진 5층짜리 좌천아파트가 있다. 자성대교차로에서 올려다보면 눈에 들어오는 ‘무지개색 아파트’다. 아파트를 지나 성북전통시장 웹툰이바구길에 다다랐다. 시장의 마스코트인 ‘또디’와 ‘단디’가 곳곳에서 율을 반긴다. 시장 상인들도 낯선 젊은이들을 보며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오늘도 우리는 걸어가네> -취재기-

■ 하늘 아래 첫 장터

성북전통시장 입구에서 150m 정도 들어가면 깐 바지락과 홍합을 내놓은 가게가 나온다. 이 시장의 유일한 해산물 가게. 주인장은 이 시장 터줏대감 이옥수(78) 씨다. 바지락을 까던 사장님은 ‘시장의 옛 모습이 궁금하다’는 율에게 가게 안쪽 자리를 내어준다. 입을 떼면서도, 바지락을 까는 손은 분주하다.

사장님이 성북시장에 처음 발을 들인 건 막내아들이 첫돌 되던 해. 지금 47살이 됐으니, 시장과 인연을 맺은 지 어느덧 50년이 다 돼간다.

사장님은 셋째를 낳고 대구에서 부산으로 왔다. 성북고개 아래쪽 범일초등학교 근처에 집을 얻었다. 그전까지 장사를 해본 적 없었지만, 먹고 살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돌쟁이 막내를 업고 동이 트기도 전에 물건을 떼러 나섰다.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로 빽빽한 버스에 몸을 싣고 충무동 시장으로 향했다.

장사가 끝나면 값이 싼 채소를 몇 개 챙겨 다시 성북고개 까꼬막을 올랐다. 어느 날은 허름한 집 담벼락 앞에서, 어느 날은 남의 집 옆에서 채소를 팔았다. 정해진 자리도 없이 반짝 물건을 팔고 나면 해가 떨어졌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 시장을 ‘번개시장’이라 불렀다. 제대로 된 장터도 아니었다. 서너 사람이 나와 물건을 팔다 보니, 어느덧 계란을 파는 사람, 오뎅을 파는 사람이 생겨났다. 이 사장님도 채소 장사를 접고, 점빵을 얻어 호떡집을 차렸다.

그때만 해도 시장은 인파로 북적였다. 동네 집집마다 삼화고무, 국제고무에 다니는 젊은이들이 가득했다. 성북고개 정류장을 지나는 유일한 버스인 86번 버스가 왔다 하면, 40~50명씩 사람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시장을 지나 범일동 골목골목, 좌천아파트, 문화아파트, 금성아파트로 지나갔더랬다.

호떡집은 장사가 잘됐다. 호떡이 5개에 100원 하던 시절. 간판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냥 ‘호떡집’이라 불렀다. 여름에는 직접 맷돌에 콩을 갈아 콩국도 팔았다. 호떡만큼 콩국도 유명했다. 일부러 찾아오는 단골 손님도 있었다. 호떡을 먹던 코흘리개 아이들은 어느덧 시집·장가를 가서 제 자식들 손을 잡고 가끔 시장을 찾는다.

“그 애들이 ‘아지매, 나는 비 오는 날에 울 엄마 생각은 안 나도 아지매 생각은 나요’ 카대요.” 사장님은 멋쩍어하면서도 ‘음식 자부심’을 쉴 새 없이 쏟아낸다.

“다대포에 사는 택시기사는 쉬는 날마다 콩국을 사 갔으요. 그때는 하루에 콩국을 서 말씩 팔았어. 내 묵듯이 해주면 손님들이 다 좋다캐요.” 돌이켜보면 그때가 시장의 ‘황금기’였다.

40년이 넘도록 호떡 장사를 하느라 어깨는 늘 말썽이었다. 오른쪽 어깨에는 두 번이나 칼을 댔다. 수술 때문에 장사를 3년이나 쉬었다.

자식들은 ‘일 좀 그만하라’며 말렸다. 평생 쉬어본 적이 없어서인지, 집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셨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니 당이 올라가는 것 같았다. 어깨가 아파 다시 호떡을 구울 수는 없었다. 시장엔 없는 해산물을 팔기로 마음먹었다. ‘성북해산물’이란 이름을 걸고 장사한 지 4년.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직 사장님을 ‘호떡 아지매’라 부른다.

바지락을 열심히 까며 율에게 시장의 옛 모습을 알려준 '성북해산물' 이옥수 사장님. 해산물 장사를 한지 4년이 넘었지만, 오랫동안 호떡집을 한 탓에 아직도 종종 '호떡 아지매'로 불린다. 서유리 기자 바지락을 열심히 까며 율에게 시장의 옛 모습을 알려준 '성북해산물' 이옥수 사장님. 해산물 장사를 한지 4년이 넘었지만, 오랫동안 호떡집을 한 탓에 아직도 종종 '호떡 아지매'로 불린다. 서유리 기자

율이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3명의 손님이 다녀갔다. 중절모를 쓴 노신사가 바지락을, 중년의 여성분이 미더덕을, 사장님 또래의 또 다른 할머니가 꼬막과 바지락을 섞어 5000원치를 사 갔다. 용돈 벌이 정도로 장사는 되지만, 사장님은 예전처럼 북적이던 시장이 그립다.

언제부터였을까. 시장에 사람이 썰물 빠지듯 빠진 게. 돌이켜 보면 성북고개 사방으로 길이 트이고 버스가 다니면서부터였다. 예전엔 택시 기사들이 손사래 칠 만큼 험한 고개였다. 버스는 86번이 유일했다. 그러다 87번 버스가 들어오고, 수정동 마을버스가 다니게 되면서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나마 시장을 지나던 문화아파트, 금성아파트 손님들도 38번 버스가 다닌 이후로부터 보이지 않았다.


■ 웹툰 이바구길

시장 입구 근처 ‘청도한우촌’을 운영하는 하영호(63) 씨는 4년째 성북시장 상인회장을 맡고 있다. ‘제일반점’을 운영하는 고명이(64) 씨, 분식점 ‘꼴랑이네’를 운영하는 이영숙(64) 씨와 함께 상인회를 이끌어가고 있다. 이들은 상인회 임원이기도 하지만, 20년 된 ‘절친’이기도 하다.

하 회장은 20년 전에 이 시장에 정착했다. IMF로 남편이 하던 일이 어렵게 되자, 사촌 언니가 장사를 하던 이곳으로 오게 됐다. 이방인이었지만, 상인들은 살갑게 반겼다. 고 사장과 이 사장은 이 동네에 30년 넘게 살면서 장사도 해온 토박이다. 익숙한 이 동네에 처음 터를 잡았고, 수십 년 동안 익숙해진 이 동네를 떠날 수가 없어 아직도 인근을 맴돈다. 부전시장이나 국제시장만큼 큰 규모는 아니지만, '시골 장터' 같은 소소함이 있는 시장이라며 서로를 위로하면서 버텨오고 있다.


4년째 성북전통시장 상인회를 이끌어 오고 있는 상인회 멤버들. 왼쪽부터 '꼴랑이네' 이영숙 총무, '청도한우촌' 하영호 회장, '제일반점' 고명이 총무. 세 사장님은 '절친' 사이다. 서유리 기자 4년째 성북전통시장 상인회를 이끌어 오고 있는 상인회 멤버들. 왼쪽부터 '꼴랑이네' 이영숙 총무, '청도한우촌' 하영호 회장, '제일반점' 고명이 총무. 세 사장님은 '절친' 사이다. 서유리 기자

시장이 살려면 인구가 유입돼야 하는데, 동네 인구는 꾸준히 빠져나갔다. 시장 끝자락에 놓인 좌천아파트는 15년 전쯤 재건축 바람이 불면서 텅텅 비어갔다. 그나마 젊은이들을 붙잡아뒀던 좌천초등학교까지 폐교되면서 시장은 고사 직전에 다다랐다.

황금기를 지켜본 이들인 만큼, 시장을 되살리고 싶은 마음도 강했다. 만화도 잘 모르고, 웹툰은 본 적도 없지만, 젊은 사람들이 좋아한다기에 시장을 ‘웹툰 이바구길’로 만들기 위해 서울의 ‘강풀 만화거리’를 몇 번이고 오갔다. 상인대학이 열릴 때마다 참석해 뒤늦은 학구열을 불태우기도 했다.

하지만 상인들의 노력만으로는 대세를 바꿀 수가 없었다. 이미 사람들이 시장보다는 마트와 백화점에 익숙해진 터였다. 특히 시장에 젊은 사람들이 없다 보니 변화에 더뎠다. 시장에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 만한 먹거리가 없다는 문제점을 찾았지만, 대책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뭘 좀 해보려던 시점에 코로나19까지 덮쳤다.

“내 탓도 네 탓도 아니고, 어느 누구도 풀어줄 수 없는 숙제인 것 같아요. 이 흐름을 거스를 수가 없어요.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일까요.” 하 회장의 물음에 율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예쁘게 꾸며놓은 성북시장 '웹툰 이바구길'. 마스코트 '또디'와 '단디'가 걷는 여자 율을 응원하듯 힘차게 걷고 있다. 서유리 기자 예쁘게 꾸며놓은 성북시장 '웹툰 이바구길'. 마스코트 '또디'와 '단디'가 걷는 여자 율을 응원하듯 힘차게 걷고 있다. 서유리 기자

■ 비둘기의 아지트

좌천아파트엔 15년 전쯤,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재건축 '광풍'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1·2동 합쳐 200세대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았다.

헌 집을 허물고 넓은 새집을 지어준단 말에 주민들은 솔깃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실 평수가 안 맞았다. '처음이랑 왜 말이 다르냐' 반발하는 주민, 그래도 재건축을 해야 한다는 주민. 입장이 나뉘어 법적 다툼까지 일었다. 지난한 싸움은 7년 동안 이어졌다. 재건축에 반대한 주민들이 승소했지만, 손에 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에겐 낡아빠진 아파트일지라도 남은 이들에겐 몸을 뉘일 유일한 안식처. 이들은 재건축으로 집조차 잃게 될까 상처뿐인 싸움을 해야 했다.

정미숙(가명·63) 씨는 지난해 7월, 40년 넘게 살아온 이 아파트를 급히 떠났다. 몇 년 전부터 비만 오면 물이 샜는데, 단순히 곰팡이가 스는 것을 넘어 천장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집이 이 지경이 됐지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윗집이고 옆집이고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이었다. 분명 소유주는 있을 텐데, 누구인지 알 턱이 없었다. 정확히 어디서 물이 새는지도 모르는 채 미숙 씨는 발만 동동 굴렀다. 위험하다 싶어 세를 주지도 못하고, 등 떠밀리듯 주변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미숙 씨의 불안한 예감은 적중했다. 지난해 8월 큰비에 결국 천장이 내려앉았다. 비가 그친 뒤 속살이 드러난 철근을 보고 미숙 씨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일 이사를 가지 않고 계속 살고 있었다면 가족들이 봉변을 당했을 수도 있었다.


수십 년간 비가 새다 결국 지난해 장맛비에 내려 앉은 미숙 씨의 집 천장. 만일 이사를 가지 않았더라면, 큰 사고를 당할 수도 있었다. 서유리 기자 수십 년간 비가 새다 결국 지난해 장맛비에 내려 앉은 미숙 씨의 집 천장. 만일 이사를 가지 않았더라면, 큰 사고를 당할 수도 있었다. 서유리 기자

아파트 중앙 계단에는 공동화장실이 있다. 지금은 대부분 1인 가구이고, 빈집도 많다 보니 한 가구당 한 칸의 화장실이 배정됐지만, 40년 전만 하더라도 두 가구에 한 칸이었다. 집집마다 식구는 5~6명. 사람 수로 치면 10명이 한 칸을 돌아가면서 써야 했다. 아침마다 순번을 기다리느라 들락날락했던 웃지 못할 광경은 이젠 추억이 됐다. 수세식 화장실은 10년 전쯤에야 도입됐다.

집집마다 사람이 빼곡하던 시절이 있었냐는 듯, 주민들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90여 세대가 살던 2동엔 이제 20세대도 채 살지 않는다. 빈집들은 창고로 쓰이거나, 창고로도 안 쓰이는 집은 비둘기들의 아지트가 됐다.

미숙 씨 아래층에 사는 임정자(가명·70) 씨는 "큰 욕심이 없다"고 말한다. 하루하루 사는 게, 죽어가는 연습을 하는 것 같다는 정자 씨에겐 비바람 치는 날 걱정 없이 두 발 뻗고 잠잘 수 있는 집이 바라는 전부다.

이들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 아파트 외벽 벗겨진 페인트에 율의 시선이 오래도록 머문다. 1969년에 준공됐으니, 아파트 나이는 벌써 쉰 살을 넘겼다. 2동보다 낡아가는 속도가 더 빠른 1동. 샛길 옆으로는 5층부터 쳐진 초록색 그물망이 내려와 있었다. 떨어지는 콘크리트 조각에 지나가는 사람이 다칠까 봐 지난해 쳐놓은 것. 그물엔 깨진 유리가 떨어질 듯 위태롭게 걸려 있다. '휑' 하는 바람 소리에 그물이 나부낀다.

지난 4일, 좌천아파트가 정부의 공공개발 대상지에 포함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율은 그 소식에 사흘 전 만난 미숙 씨와 정자 씨를 떠올린다.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흥얼거렸던 노래의 후렴부 가사가 다시금 머릿속을 스친다.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이 길의 끝에서, 그들의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더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집에서 떨어져나온 유리창이 추락방지 그물에 걸려 바람이 불 때마다 떨어질 듯 위태롭게 흔들린다. 서유리 기자 더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집에서 떨어져나온 유리창이 추락방지 그물에 걸려 바람이 불 때마다 떨어질 듯 위태롭게 흔들린다. 서유리 기자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촬영·편집=이재화·정수원·김보경 PD, 진유민 작가

그래픽=장은미 기자 mimi@busan.com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 이재화기자 jhlee@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 김보경기자 harufor@busan.com , 진유민 jmin@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