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라-리] 차원이 다른 '오륙도 지하벙커'…'16인치 캐논포'의 흔적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이재화기자 jhl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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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미스터리 수사대 '날라-Lee'.

<부산일보> 독자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날라'주는 '이' 기자입니다.

갈고 닦은 취재 기술로 도심 속 미스터리를 파헤칩니다. 문득 '저건 뭐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주저 말고 제보해주십시오. 동네 어르신의 '전설 같은 이야기'도 언제든 환영합니다. 작은 제보가 거대한 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동해와 남해가 만나는 바다섬 '오륙도'. 웅장한 해안 절경을 간직한 이 일대에 거대한 지하벙커가 뚫려 있다는 제보입니다.

이전 '태종대 지하벙커'(busan.com 1월 27일 자 '강제징용된 그들은 어디에…굳게 닫힌 태종대 땅굴 1부'편 참고)처럼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구축한 포진지 시설이라고.

내부 크기는 여태껏 들어갔던 어떤 땅굴보다도 크다고 합니다.

부산 남구 용호동 오륙도SK뷰 아파트 바로 옆 작은 언덕. 바닥에 가로세로 1~2m 크기로 의문의 철문이 덮였습니다. 언뜻 보면 빗물이나 오폐수를 흘러보내는 배수 구멍처럼 보입니다.

"자, 하나씩 집으십시요."

정규섭 남구문화관광해설사가 어깨에 매고 온 대형 검은 봉지를 철문 옆에 펼쳤습니다. 안전모, 손전등, 우비, 목장갑….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습니다. 철문 자물쇠를 열고 사다리로 5m 수직 하강. 인적이 드문 듯 철사다리 사이사이 거미줄이 보였습니다.

동굴 바닥은 비 온 땅이 마르지 않은 듯 축축이 젖었습니다. 머리를 숙여 좁은 입구를 한 번 더 통과한 뒤, 햇빛이 사라진 '암실'에 일제히 손전등을 비췄습니다.

높이 2.6m, 폭 3m. 대형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활처럼 굽어진 길을 따라 10~20m를 걷자 지하벙커 본진이 나왔습니다.

길이 45m, 폭 14m. 여느 동굴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규모. 동굴 안은 여기저기 버려진 폐기물로 뒤덮였습니다. 드럼통, 가게 간판, 페인트통 등등.

땅 위 토사가 무너져 내려 길이 막힌 곳도 있습니다. 세 갈래로 나뉘었던 길도 벽이 무너져 내려 원치 않게 한 공간이 됐다고.

오륙도 지하벙커는 1929년 일본군이 구축한 '해안 포진지' 시설이었습니다.

오륙도 장자산 자락 일대는 당시 '장자등 포진지'였습니다. 러일전쟁 후 일본이 본토 공격에 대비하고자 이곳을 군사요새화한 겁니다.

무려 5000여 평 부지에 500여 명 군사가 주둔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3개 포대와 탄약고가 있었던 우리나라 최대 포진지였다고.

취재팀이 들어간 지하벙커는 '16인치 캐논포'가 있던 곳입니다. 1920년대 초 강대국들의 해군 군축조약에 따라 일본은 함선을 줄였고, 함선에 있던 포들을 장자등, 토요포대 등 해안 포진지에 설치한 겁니다.

과거 동굴 내부에는 탄을 옮기는 레일이 깔렸고, 탄을 끌어올리기 위한 축력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함포는 1940년대 태평양전쟁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손됐습니다.

일본군이 오륙도에 구축한 관측소 흔적. 일본군이 오륙도에 구축한 관측소 흔적.

이날 둘러본 오륙도공원 일대에는 일본군이 구축한 관측기지, 해수표, 탄약고도 있었습니다.

두꺼운 축대 일부가 남아 있는 관측기지는 풀숲에 뒤덮여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바다에 박혀 있는 해수표는 2018년 제25호 태풍 '콩레이' 때 부서졌다고. 해수표는 군사작전을 위해 해수면의 높이를 파악하는 구조물입니다.

지하벙커와 100~200m 떨어진 탄약고 입구. 지하벙커와 100~200m 떨어진 탄약고 입구.

다행히 탄약고는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해군작전사령부가 주민에게 개방한 산책로 옆에 동굴 형태로 조성돼 있습니다. 탄약을 운반해야 할 캐논포 기지와는 100~200m 정도 거리에 있습니다.

길이와 폭은 각각 100m, 50m. 초대형 탄약고입니다. 해방 이후에는 문서보관소로 쓰였다고. 안전 등의 이유로 이날 내부에 들어가진 못했습니다.

탄약고 내부 모습. 정규섭 해설사 제공 탄약고 내부 모습. 정규섭 해설사 제공

장자등 포진지는 해방 이후 역사까지 담고 있습니다. 1946년 소록도로 강제이송되지 않고 떠돌던 한센인 200여 명이 정착한 곳입니다. 실제 지하벙커 내부에는 한센인들이 앞바다에서 잡아 온 해산물로 담근 젓갈통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곳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서글픈 땀'도 맺혔습니다. 600명이 6개월간 별다른 장비도 없이 산을 깎고 철근을 덧대고, 거푸집을 놓고…. 군사기지의 외부 노출을 막으려, 동원된 인부들은 한밤 중 배를 타고 주변을 맴돌다 몰래 들어갔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장자등 포진지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미 인근 아파트 건설 등으로 많은 흔적이 사라졌습니다.

김윤미 교수는 "해방 이후 일본은 빠져나갔지만 '아픈 상처'는 그대로 남았고, 이제 이를 기억할 수 있는 현장도 별로 없다"면서 "장자등 포진지와 같은 곳을 '역사 교육장'으로 만든다면 그때 상황을 더욱 잘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최근 부산 남구문화관광해설사들은 장자등 포진지 개발을 위한 청원문을 작성했습니다.

"상업적인 측면으로만 보고 '관광 사업성이 없다' '관광객이 적다'며 개발을 도외시하는 관계자들의 역사 인식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아픈 역사'는 지금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승훈·남형욱 기자 lee88@busan.com

제작=정수원·이재화 PD 김서연·배지윤 대학생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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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이재화기자 jhl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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