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라-리] 부산 황령산에 1300평 초대형 동굴이?!…'물만골 벙커'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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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미스터리 수사대 '날라-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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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도심의 황령산 자락에 대한민국 최대 규모 벙커가 있다는 제보입니다. 유명 예능 세트장, 영화 촬영지로도 쓰일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 있다는데, 과연 어떤 곳일까요?

부산도시철도 물만골역 3번 출구. 인근 연산 더샵아파트 앞 산길을 따라 10여 분을 오르자, 왼쪽에 대형 중장비가 오갈 수 있는 큰 철문이 나타났습니다. 안쪽에는 일반적인 공사장처럼 컨테이너, 건설 자재들이 널브러져 있고, 인부들이 수시로 오갔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방공호가 있기엔 공간이 너무 협소하다 싶었습니다.

기대와 다른 현장에 실망하려던 찰나, 저 멀리 어두컴컴한 동굴 입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산 속에 뚫린 터널처럼 시멘트로 잘 마감된 거대한 벙커였습니다.

부산 최대 지하벙커인 줄 알았던 '오륙도 지하벙커'(busan.com 부산닷컴 6월 4일 자 '차원이 다른 오륙도 지하벙커…16인치 캐논포의 흔적'편 참고)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차량은 물론 탱크까지 들락날락할 만큼 동굴 내부가 넓습니다. 동굴을 소유한 경동건설에 따르면 폭은 3.4m, 높이는 3.6m에 달합니다. 순수 동굴 면적만 무려 4330㎡, 약 1300평입니다.

촬영 당일인 6월 21일은 부산 기온이 28.5도까지 치솟았습니다. 그러나 동굴에 들어서자 사방에 '무풍 에어컨'을 켠 것처럼 서늘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습니다. 몸에 한기가 감돌 정도였습니다. 건설사 관계자는 "연중 동굴 실내 평균온도는 11.9도"라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공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물만골 벙커' 내부는 알파벳 소문자 'h' 모양을 닮은 구조입니다. 긴 중앙 통로만 200m는 족히 돼 보였습니다. 중앙 통로를 따라 회의실, 화장실, 막사 등이 양쪽으로 나 있고, h 구조 중간에는 식당, 세면대 등 크고 작은 공간이 밀집해 있습니다. 군대처럼 병사들이 배식을 받고, 식기류를 씻는 공간도 보였습니다. 특히 h 중간은 워낙 복잡한 구조여서, 자주 드나드는 건설사 관계자도 길을 잃을 때가 잦다고 합니다.

h 구조 중간에는 황령산 중턱과 연결되는 비상 통로가 있습니다. 아쉽게도 이날은 최근 영화 촬영으로 인해 비상 통로를 막아 놓은 상태였습니다. 건설사에 따르면 비상 통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산으로 이어지는 문이 나온다고. 또 계단을 오르다 보면 시멘트 벽이 아닌 거친 바위들이 등장하고, 바위 틈에는 예전 동굴을 뚫을 때 썼던 다이너마이트 흔적도 보인다고 합니다.

강당, 회의실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방 하나는 유난히 넓었습니다. 중앙 무대를 기준으로 계단식 좌석이 놓였고, 뒤쪽에는 작은 창이 뚫린 영화관 영사실 같은 공간도 마련돼 있습니다. 실제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이 공간을 영화관으로 꾸며 사용했습니다. 건설사 관계자는 "큰 규모 때문인지 영화나 예능 촬영지로 자주 쓰이고 있다"면서 "지난주에도 드라마 촬영팀이 왔다 간 거로 안다"고 전했습니다.

거대한 물만골 벙커는 언제, 무슨 이유로 지어졌을까요?

구체적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일제강점기 때 만든 굴을 확대·개조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문가에 따르면 황령산, 금련산 일대는 일제강점기 때 자원약탈을 위한 크고 작은 광산들이 있었습니다. 또 산 위쪽으로 고사포진지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이에 물만골 벙커의 전신이 일제강점기 광산이나 군사용 방공호였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벙커는 1968년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국가 유사시 군 지휘부나 행정기관이 들어와 임시본부를 꾸릴 수 있도록 벙커를 만든 것입니다. 실제 내부 환기통 등은 적의 수류탄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기울어져 있습니다. 높은 천장과 복잡한 내부 연결로, 전기·배수 시설 등을 볼 때에도 군사 작전이나 대피에 적합한 공간으로 보였습니다.

벙커 조성에는 1206 공병단 소속 군인들이 투입됐으며, 물만골 주민들도 일부 참여한 거로 전해집니다. 공사는 1970년대 마무리됐으며, 이후 군인들이 주둔하며 관리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 보초도 없이 방치돼 왔다고 합니다. 이후 경동건설이 근처 부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벙커도 함께 포함됐습니다.

대규모 동굴답게 향후 활용 방안에 대한 논의도 뜨겁습니다. 2016년에는 ‘물만골 벙커’ 활용 아이디어 국제공모전이 열려 29개국에서 110여 개의 작품이 접수됐습니다. 호텔, 미술관, 포도주 양조장, 콘서트홀 등 다양한 프로젝트가 제안됐습니다.

황령산을 가로지르는 초대형 벙커. 지니고 있는 역사의 무게 또한 가볍지 않습니다.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지역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특별한 공간'으로 재탄생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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