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라-리] 제비뽑기로 일본군 사령관실·막사 '분양'…가덕도 외양포 '포진지 마을'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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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미스터리 수사대 '날라-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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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가덕도 새바지항 일대에 뚫려 있던 일제강점기 동굴들(busan.com 5월 28일 자 '마침내 다다른 가덕도 절벽 동굴, 안에서 발견된 그것의 정체는…'편 참고). 헬멧 쓰고 밧줄 타며 어렵사리 들어갔지만, 가덕도의 핵심은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군의 본진 격인 '외양포 포진지'.

과연 어떤 곳일까요? 가덕도 방문만 벌써 5번째, 다시 가보겠습니다.


가는 곳마다 '차박(차에서 숙박) 스폿'. 감탄이 절로 나오는 해안 절경 앞에 가덕도 '외양포 마을'이 있습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독특한 '적산가옥'이 눈에 띕니다. 벌겋게 녹슨 철제 슬레이트가 벽을 덮었고, 창문 위에는 짧은 처마 같은 '눈썹지붕'이 있습니다.

골목길을 따라 100m가량 오르자 외양포 포진지 입구가 보입니다. 바로 아래에는 포진지 주둔군이 썼을 법한 '화장실 터'가 남아 있습니다. 6개 작은 공간이 콘크리트로 나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공동 화장실'로 추정됩니다.

포진지 안쪽에 들어서자 지름이 족히 3m는 돼 보이는 둥근 구덩이(포좌)가 나란히 있습니다. 280mm 유탄포를 배치했던 '포좌'라고. 한 공간에 두 포좌(2문)씩 총 6문이 있습니다.

포좌들 사이에는 아치형 언덕이 나 있고, 그 아래에는 탄약고가 뚫렸습니다. 내부는 가로 3m, 세로 5m 규모입니다. 진입문은 이중으로 엇갈리게 뚫어, 폭발 등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도록 했습니다.

탄약고 건너편에는 소대 내무반 정도의 엄폐 막사 2곳이 있습니다. 엄폐 막사답게 공중에서 포진지가 노출되지 않도록 지붕에는 여러 수목이 심겼습니다.

외양포 포진지는 옛 모습을 복원하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줬습니다. 부서진 콘크리트와 벽돌, 함몰된 포좌 구덩이 등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았습니다.

엄폐 막사와 탄약고 벽면에는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홀로그램' 영상이 나옵니다. 현재 재단장 중이어서 일부 영상이 깨져 보였지만, 나름 관광화가 추진된 모습입니다. 대규모 공간답게 각각의 장소를 설명하는 표지판도 세워졌습니다.

외양포는 사실상 마을 전체가 일본군 흔적이었습니다. 목욕탕, 우물, 내무반, 사령관실, 무기고, 헌병부 등의 건축물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았습니다. 몇몇 우물은 지금도 사용하는 듯, 물이 차 있었고 일본군 막사에는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마을 옆 산에는 대공포진지가 있던 관측소도 있습니다.

가덕도 남쪽 한적한 포구였던 외양포.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인해 원치 않게 포진지가 됐습니다. 일본군은 러일전쟁의 승기를 잡기 위해 진해 쪽에 대규모 함대를 뒀습니다.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러시아 발트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집결한 겁니다. 그리고 이 함대를 지키기 위해 외양포, 저도 등 주변 중요 섬에 포진지를 만들었습니다.

1904년 8월 일본군 공병이 외양포에 포진지와 부대막사 등을 지었고, 1905년 5월 7일에는 편성 부대가 상륙했습니다.

외양포 일대에는 러일전쟁 이후 1930~1940년대 벌어진 아시아태평양전쟁 흔적도 있습니다. 당시 미군 비행기를 막기 위해 주변 산에 대공포를 설치하고 대항동, 새바지 등 인근 마을에 방어용 동굴을 뚫었습니다.

포진지 구축으로 외양포 원주민들은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당시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시키는 과정이어서 강제로 토지를 빼앗고 주민을 이주시키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졌습니다. 주민 이성태(67) 씨는 "듣기로는 일본군이 강제로 불 지르면서 주민들을 쫓아냈다고 하더라"고 했습니다.

현재 주민이 거주하게 된 것은 일본 패망 이후입니다. 다시 돌아온 주민들은 남아있는 부대 시설을 '제비뽑기'로 나누었습니다. 뽑기를 잘한 사람은 나름 시설이 좋은 사령관실에 입주하는 식입니다. 길게 뻗은 병사 막사는 4개 세대로 나누어 분양(?)했습니다.

이날 본 옛 병사 막사는 4개 집으로 나뉘어 지붕 색깔도 제각각이었습니다. 중간의 한 집은 테라스와 꽃밭도 꾸미는 등 깔끔하게 리모델링했습니다. 끝집에 사는 70대 주민은 "사실 이 주변은 다 논밭이었는데 여기에 일본군이 내무반을 지었다"면서 "이중 하나를 저희 할아버지 때 분양을 받았는데, 지금은 기둥이 삭아서 시멘트를 보강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외양포 마을은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변 신공항 개발로 마을 전체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습니다. 전문가들은 비록 탄압과 침략의 역사이지만, 미래세대를 위한 가치 있는 역사자원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형태로 기록화하고 보존할지 지금부터 논의해야 합니다. 사라지고 난 뒤 후회하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당장 근현대 유적에 대한 가치 판단이 어렵다면, 다음 세대가 적절히 평가할 수 있도록 남겨둬야 합니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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