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의 시인의 서재] 이미지 정치의 한계와 모성적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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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시와사상’ 편집위원

가을이 깊어 간다. 산속에서는 햇빛이 잘 드는 곳의 잎사귀가 먼저 말라 떨어진다. 계곡 근처에 있는 음지의 나무들이 더 선명한 색깔로 단풍이 든다. 아름답게 물들기 위해서는 찬란한 양지보다 그늘이 더 좋은 조건이다. 사람도 실패하거나 좌절한 경험을 솔직하게 토로하는 모습에서 인간미를 느끼게 한다. 2022년 대통령 선거의 후보자 가운데 서울대 출신 혹은 검사와 변호사의 경력을 가진 분들이 많다. 국민들의 리더를 선출하는 기준에 있어 한쪽으로 편중된 것 같아 우려스러운 측면이 있다.

대선 후보들 실망스러운 미디어 토론
유머라곤 없는 거친 입에 이미지 정치만
가정 내 돌봄 문제 세심하게 살폈으면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아 야당 후보들이 나와 TV 토론을 하는 것을 본다. 여당에서는 이재명 후보가 먼저 선출되었지만 전 국민이 시청할 수 있는 활기찬 TV 토론 과정이 없어 아쉬웠다. 이미지 정치는 1960년 제35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케네디와 닉슨이 TV와 라디오 토론을 한 것에서 유래한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닉슨의 지지율이 더 높게 나왔지만, TV 토론에서 케네디의 지지율이 높아 승리의 요인이 된다. 케네디는 미남인데다 파란 재킷의 세련된 옷차림으로 ‘강한 미국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자신감 있게 피력한 점이 주효했다.

미국의 정치를 동경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부러운 것이 있다. 미국에서 정치인의 기본 자질로 꼽는 것 중의 하나가 ‘유머’이다. 공화당의 레이건 대통령은 자신의 나이가 많은 것에 대해 상대로부터 신랄한 공격을 받았을 때, 부드러운 유머로 응수하는 매력이 있었다. 정치적 관점의 차이나 비전에 대해 비판하거나 공격하더라도 그 사이에 빛나는 한 칼이 있어야 한다. 상대편을 사지로 몰아넣으려는 과도한 공격성보다는 원만히 수용하면서 이끌어 갈 수 있는 혜안을 가진 지도자를 국민은 갈망한다.

사실, 시민들의 정치의식 수준이 높아 그에 부응하는 후보자를 만나기 쉽지 않다. 유능한 젊은 정치인의 진출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구조 탓이다. 이미지 정치에 능수능란한 정치인은 법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거나, 자신의 실책을 교묘하게 포장하고 은폐시킬 수 있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방식이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략은 사라져야 한다. 이미지 정치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 문화가 필요하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처럼 한국에도 부드러운 모성으로 국민을 섬세하게 돌보는 정치인이 선출되기를 희망한다.

대선 후보들의 TV 토론을 지켜보니 다소 지루한 느낌이 든다. 예컨대 남북통일 문제와 관련해서라면, 보다 참신한 정치적 비전은 없는 걸까? 보통 시민들도 유추할 수 있는 정도의 논의만 오가는 것 같다. 상대에 대한 흠집 내기 말고는 첨단 미래 사회를 주도할 새로운 가치 창출이나 생존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캐나다 여성 시인인 앤 카슨(Anne Carson)의 시집을 읽는다.

그녀는 고전문학을 전공했는데 시·소설·평론의 경계를 허무는 아주 독특한 글쓰기를 실행한다. 고대 그리스의 문학과 포스트모던한 글쓰기가 서로 교차하면서 탈주를 한다. 사실 한국 문단이나 학계에서는 선 긋기를 하거나 경계를 지키는 경향이 강하다. 문학 연구에서 시·소설·희곡·비평처럼 장르별로 전공이 나뉘어 있다. 시인은 주로 시를 쓰고 소설가는 소설에 매진하고 그러한 행태를 더 인정해 주는 분위기이다. 영어권과 다른 나라에서는 그 경계가 훨씬 느슨하고 자유로운 경향이 있다.

앤 카슨의 시집 에 수록된 ‘히어로’는 치매를 앓는 아버지를 면회하는 장면을 소설적 화법으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겨울의 어느 일요일 밤이었다./ 나는 그의 문장들이 두려움으로 가득 차오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한 문장을 시작했다―날씨에 대해, 그러더니 도중에 길을 잃고 또 다른 문장을 시작했다./ 허둥대는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몹시 화가 났다―.’ 훤칠한 키에 비행병으로 활동했던 옛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요양병원에서 쇠락해 가는 아버지. 치매 환자 가족의 슬픔과 곤란한 상황을 다룬 묘사는 아주 사실적이다. ‘나는 그의 앞니가 검게 변해 가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나는 미친 사람들의 이는 어떻게 닦아 주는지 궁금하다.’ 그의 시는 늙어 가는 노인을 돌보는 사회적 안전장치와 시스템에 대한 사유를 유도한다.

진주의 한 요양병원에 계신 엄마를 걱정하면서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는 정신이 맑아서 어쩌면 더 불편할 수 있는 노년의 삶이다. 주말에는 면회가 안 된다니 갑갑하고 속상하다. 가정 내의 돌봄이 이미 한계에 처한 우리 사회에 정치권력의 섬세한 작동이 요청된다. 국민을 가족처럼 돌볼 수 있는 성정을 가진 지도자를 만나고 싶다. 가을 오후에 커피 한 잔을 마시는데 무심하게 구름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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