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나쁜 빚, 괜찮은 빚
김대래 신라대 글로벌경제학과 명예교수
빚은 어떤 것이든 물론 좋지 않다. 무언가 남에게 갚아야 할 것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부담이고 자유롭지 않은 상황을 만든다. 그러면 현실경제에서 누가 빚을 질까? 경제활동을 하는 모든 주체가 빚을 질 수 있다. 국가가 다른 나라에 빚을 지면 외채라고 하는데, 1997년 말의 외환위기가 바로 그 외채 때문에 온 것이었다.
수출 호조로 외채 걱정 없다지만
가계·정부부채 증가는 걱정 많아
빚 좋진 않아도 과도한 걱정 금물
올해 세수 이미 50조 이상 걷혔고
자산 취득 없는 정부부채는 달라
위기 극복할 탄력적 재정 운용을
개인이 빚을 지면 가계부채, 기업이 빚을 지면 기업부채라고 한다. 그리고 정부가 빚을 지면 국가부채라고 부르는데, 사실 정부채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하다.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 왔던 것은 기업부채이다. 기업들은 수익이 악화하면 빚을 지게 되고, 그러다가 갚지 못하게 되면 도산한다.
흔히 IMF 사태로 부르는 외환위기를 우리나라가 빠르게 극복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제조업이 탄탄하게 받치고 있는 것이 주효했지만, 가계와 정부의 건전한 재정상황도 크게 기여하였다. 외환위기로 급격한 경기침체를 맞은 정부는 소비 진작을 위해 신용카드 사용을 장려하는 정책을 썼는데, 무분별한 카드 발행이 이루어져 부작용이 적지 않게 나오기도 했지만, 가계소비 증가는 경기를 살리는 데 일정 정도 보탬이 되었다. 가계수지가 건전했기 때문에 좀 더 쓰게 해도 괜찮았다.
미래의 재정을 당겨쓰는 정부지출 확대는 1930년대 공황 이후 거의 모든 나라가 사용해 온 방법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우리나라도 복지 수요 충당과 경기부양을 위한 방편으로 세수를 넘는 재정지출의 확대를 조금씩 지속해 왔다. 그러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침체에 대응하여 재난지원금이라는 형태로, 이전에 보지 못했던 규모로, 재정을 투입하였다.
사상 유례없는 수출의 호조로 외채의 걱정에서는 비켜나 있지만, 대신 가계부채와 정부부채가 너무 많이 증가한다는 걱정이 터져 나오고 있다. 그때마다 정치적 쟁점이 되면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빚이 늘어나는 것 자체가 물론 좋을 수는 없지만, 모든 빚에 대해 과도한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것도 정당하지 않다. 빚에도 나쁜 빚과 괜찮은 빚이 있다.
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에서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것은 맞다. 그러나 이것이 소득도 없이 흥청망청 쓰기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다. 소비로 낭비하지 않는 한 빚은 주로 자산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저축을 넘은 금액을 자산 구입에 쓸 경우 빚이 생기게 되지만, 장부의 반대편에는 구입한 자산이 기재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주택 구입에 쓰는 지출 규모가 매우 큰데, 가계 빚의 주원인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단순히 가계부채 규모와 증가율을 다른 나라와 비교하는 것은 별로 적절하지 않다.
정부의 부채는 자산 취득이 없다는 점에서 가계부채와 성격을 달리한다. 오랫동안 재정은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이 지배해 온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 원칙은 이미 대공황을 겪으면서 많이 약화하였다. 균형재정을 유지하면 좋겠지만 위기를 외면해 가면서까지 지켜야 할 금과옥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획재정부가 고수하고 있는 재정준칙은 좀 더 유연해져도 괜찮다. 더구나 올해 우리나라의 세수는 본 예산에 비해 50조 원 넘게 이미 더 걷힌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얼마 전 한 여론조사에서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추가 지급하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국민들이 반대한다는 결과를 보았다. 참으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먼저 스쳐 갔다.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여 어려움을 참겠다는 것은 대단한 헌신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 안타까운 생각이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코로나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처한 국민들이 적지 않을 텐데 이들이 굳이 정부의 지원금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처해 있을 절박한 상황을 외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부채무를 외채로 생각하여 IMF와 같은 상황이 다시 와서는 안 된다는 착한 착각 때문에 사양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슬프게도 자신들의 어려움을 감춘 지극히 정치적인 응답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잖아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책의 정치화가 너무 심각하다.
지금의 상황으로 보면 코로나가 조기에 종식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는 백신 접종 완료 이후에도 다시 봉쇄하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코로나로 인한 재난지원금 지급을 두고 또다시 논의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기본소득에 대해 지금은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지만 결국은 그쪽으로 가게 되어 있다. 위기의 시대에는 위기를 잘 극복하도록 탄력적으로 재정을 운용할 필요가 있다. 위기를 넘기 위해 늘어나는 빚은 나쁜 빚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