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프로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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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용 스포츠부장

지난해 12월 초 강원도 강릉종합운동장에서 프로축구 K리그 승강플레이오프 2차전이 열렸다. K리그1 잔류를 노리는 강원FC와 1부리그 승격에 도전하는 K리그2 대전하나시티즌 간 마지막 한판대결이었다. 사활을 건 두 팀의 열전은 강원의 4-1 승리로 끝났다. 승강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대전에 0-1로 졌던 강원은 1·2차전 합계 4-2로 극적인 역전극을 쓰며 K리그1 잔류에 성공했다.

노골적인 경기 지연·팀 무단 이탈 등
지난해 프로스포츠 비매너 행위 잦아
팬 분노·외면으로 관중 감소 이어져
품격 있는 자세로 팬심 다시 잡아야

그러나 이 경기는 다른 일로 더 논란이 됐다. 홈 팀인 강원 볼보이들의 ‘경기 지연 행위’가 도마에 오른 것이다. 이날 볼보이들은 홈 팀 강원이 앞서가자 노골적으로 공을 늦게 전달했고, 골라인 밖으로 나간 공을 아예 주우러 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일부 원정 온 대전 팬들은 볼보이를 향해 물병을 던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더 황당한 일은 강원 최용수 감독과 이영표 대표의 입에서 나왔다. 경기 후 최 감독은 볼보이의 지연 행위에 대해 “전 세계 어디에서나 홈 이점이 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유럽에선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은 듯 취급했다.

그러나 비매너 논란이 지속되자 이 대표는 구단 공식 채널에 “매끄럽지 못한 경기 진행으로 잔류의 기쁨보다 책임감으로 마음이 무겁다”며 사과 글을 올렸다. 급기야 한국프로축구연맹도 상벌위원회를 열어 강원 구단에 제재금 3000만 원을 부과하는 징계를 내렸다.

사실 홈·원정 경기를 치르는 프로 스포츠에서 ‘홈 어드밴티지’는 어느 정도 작용한다. 하지만 홈 어드밴티지라는 것은 수많은 홈 팬들의 압도적인 응원을 등에 업고 뛰는 이점이 대부분이다. 간혹 홈 팀에 유리한 판정 의혹이 불거지기도 하지만, 최근엔 비디오 판독(VAR)이 도입돼 이런 논란도 사라지고 있다. 더군다나 유럽 축구에서 볼보이가 대놓고 고의적으로 경기를 지연하는 행위는 최근에 본 기억이 없다.(지금은 안방에서 혹은 휴대폰으로 유럽 축구를 얼마든지 시청할 수 있는 시대다)

아무리 승리가 중요하다 해도 공정한 경기를 통해 이겨야 하는 것이 ‘스포츠 정신’이다. 이날 볼보이는 홈 구단 강원의 유스팀인 고교 선수들이 맡았다. 차세대 프로 선수로 성장할 수 있는 어린 선수들이 벌써부터 이런 식의 승리에 맛들여서야 되겠는가. 비록 구단에서 경기 지연 행위를 지시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실상 묵인·방조한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지난해를 되돌아보면 국내 프로 스포츠계에 크고 작은 일탈행위가 적지 않았다. 유명 선수들의 학교폭력 고발이 수시로 터져 나왔다. 여자 프로배구 이재영·다영 쌍둥이 자매의 학폭 논란은 거의 1년 내내 지속됐다. 소속팀에서 사실상 방출된 두 선수는 도망치듯 그리스로 떠났다.

IBK기업은행 조송화 선수와 김사니 코치는 팀 무단 이탈과 감독에 대한 항명으로 또 한 번 배구계를 흔들어 놓았다. 남자 프로배구에선 대한항공 정지석이 ‘데이트 폭력’과 불법 촬영 혐의로 고소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정지석은 일부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를 받았으나, 대한항공은 여자 배구가 시끄러운 틈을 타서 정지석을 슬그머니 코트에 복귀시켰다.

남자 프로농구 KT는 일방통행식으로 17년 연고지 부산을 버리고 수원으로 옮겨 부산 팬들을 우롱했다.

프로야구는 일부 선수들이 방역수칙을 어기고 술판을 벌여 비난의 집중 포화를 맞았다. 이로 인해 몇몇 선수가 코로나19에 감염되며 사상 초유의 리그 중단 결정이 내려졌고, 이어진 도쿄올림픽에서도 초라한 성적을 남겨 팬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기도 했다.

최근 프로 스포츠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는 말이 많다. 코로나19로 인한 영향도 있지만, 스포츠계가 자초한 면도 있다. 품격에 맞지 않는 비매너, 불공정 행위로 팬심을 저버린 게 자충수로 돌아오고 있다. 단적으로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인 프로야구는 지난해 포스트시즌 11경기 중 단 2경기만 매진 사례를 기록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완화하고 관중 입장을 전면 허용했는데도 이 정도였다.

미국 시인 랠프 월도 에머슨은 “당신의 매너는 언제나 평가받고 있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예상치도 못한 큰 보상을 받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기준이 된다”고 말했다. 이는 모든 스포츠인이 곱씹어 볼 경구다. 공정·정의가 화두인 시대에 매너 없는 스포츠는 팬들의 외면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새해엔 부디 선수나 구단 모두 경기장 안팎에서 품격 있는 플레이로 팬심을 다시 잡길 기대해 본다. kyje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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