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통도감에서 군기시로 이어진 빛난 얼
[SNT모티브와 함께 하는 자주국방인in人] 화통도감(火㷁都監) 군기시
화약수련법에서 총통등록(銃筒謄錄)으로 이어진 화약 무기 연구 역사
화통도감 무기 제작 시연 장면을 재연한 최무선박물관 사료실.
대장군(大將軍) ·이장군(二將軍) ·삼장군 ·육화석포(六火石砲) ·화포(火砲) ·신포(信砲) ·화통 ·화전(火箭) ·철령전(鐵翎箭) ·피령전(皮翎箭) ·철탄자(鐵彈子) ·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 ·유화(流火) ·주화(走火) ·촉천화(觸天火) 등은 고려말 최무선이 설립한 화통도감에서 만든 20여 종의 화약 무기다. 화통도감은 한반도 최초의 ‘화약 무기 조병창’ 혹은 '국방과학연구원'으로 불린다.
총통은 화약으로 화살을 발사하는 화약 무기류인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총통은 고려시대 고총통이다. 1377년 만들었다고 총통에 명문이 새겨 있다.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 있는 이 고총통은 그러나 정확하게 한반도(고려)에서 만든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뒤 화통도감에서는 이와 유사한 국산 총통을 직접 생산했다.
화약제조법을 익힌 최무선은 1377년(우왕 3년) 본격적으로 화약과 화약 무기를 제조하는 화통도감 설치했다. 최무선의 화약 무기는 왜구와의 실전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화통도감은 1389년(창왕 1년) 군기시(軍器寺)에 흡수통합 됐다. 화통도감이 폐쇄된 것은 당시 실권자인 이성계의 통치 정책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군기시는 고려 목종 때 설치한 군기감을 공민왕 때인 1362년 개청한 기관이다. 군기시의 역할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1377년 제작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고총통. 국립진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이재희 기자 jaehee@
조선이 개국한 1392년(태조1년) 태조는 화약 무기의 중요성 등을 인식하고 군기감을 설치했다. 이후 1466년 세조는 군기감을 군기시로 바꾼다. 평화 시기가 이어지자 군기시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었다. 대신 지방의 각 군영이나 훈련도감 등에서 자체적으로 화약 무기를 생산하는 식으로 바뀐다. 군기시는 1884년(고종21년)까지 이어지다가 대원군에 의해 폐쇄된다.
화약 무기 관련 저술은 최무선이 썼다는 화약수련법과 화포법이 문헌으로 남아있지만 전해지지 않는다. 최무선의 아들 해산은 아버지가 남긴 책으로 공부해 화약 전문가가 된다. 이어 해산은 독창적인 화약 무기 화차를 개발했다. 1445년 조선 세종대에 이르러 화약 무기 교본인 총통등록이 편찬된다. 총통등록의 발간은 조선의 화약 무기가 종전의 중국식 화기를 모방한 데서 벗어나 독창적인 조선의 화약 무기 체계를 갖춘 것으로 평가한다.
총통등록은 화포의 주조법, 화약 사용법을 그림과 글로 기록하고, 정확한 규격을 적었다. 이 책은 일종의 화약 무기 제조서로 군기감은 이 책을 바탕으로 화약 무기를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의 독자적 화약 무기는 '화력 강국 조선'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이 책은 다른 문헌에서 존재를 확인할 뿐 전해지지는 않는다.
최무선의 화통도감에서 개발한 고려 화약 무기.
국립진주박물관 김명훈 학예연구사는 "세종 16년 세종실록을 보면 군기감의 화약장(염초장 35명, 취토장 35명)이 무려 70명이라고 기록돼 있다"며 조선초기 정부의 화약 무기 중요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또 김 학예연구사는 "1661년 발행한 경국대전에도 군기시 장인은 철의 생산과 주조 단조로 군기 및 농공구를 제작하는 장인인 야장이 130명, 연장 장인이 160명, 칠장 12명, 화포 제작과 화살촉을 끼울 구멍을 만드는 장인인 마조장이 12명, 금속을 녹여 주조하는 장인인 주조장 20명, 군기에 기름칠하는 유칠장이 2명, 목재를 다루어 기물을 만드는 장인인 목장 2명 등이 존재했다"며 "군기시는 체계적으로 화약 무기를 생산한 지금의 국방과학연구원과 조방창을 합친 것 같은 무기 연구, 제작기관이었다"고 말했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화약 무기 관련 성과가 오늘날 국방부 조병창의 후신인 SNT모티브에서 K시리즈 국산 총기를 개발하고 양산하는 밑거름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