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시대 문화풍경] 울림의 억센 가락 ‘3·4월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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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4월혁명은 3·15부정선거에 대한 항거로 시작해 정권 퇴진을 이끌어냈다. 특정 정치세력이나 기득권 집단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즉 민중이 분연히 떨쳐 일어서 마침내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사건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4월혁명 정신의 계승을 명시하고 있듯이, 4월혁명은 민주주의의 근본이념을 상징한다. 해방 이후 최초로 경험한 민중의 승리는 우리 힘으로 민권을 회복하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다는 각성으로 이어졌다. 민중이 단순히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부당한 정권을 심판하는 주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한 계기가 바로 4월혁명이었다.

4월혁명은 1960년 2월 유세가 한창이던 대구에서 학생시위를 시작으로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로부터 촉발되어 전국적인 항쟁으로 이어졌다. 3·15마산의거에 참가했다가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된 김주열은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4월 19일에는 정부의 유혈진압에 100여 명이 희생됐다. 선연한 피의 날이었다. 시위는 장렬했지만 4월혁명은 이날 하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2월 28일부터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4월 26일까지 전국에서 숱한 사람들이 민주의 제단에 피를 바쳤다. 학생이나 지식인뿐만 아니라 구두닦이와 신문팔이 소년, 넝마주이, 노동자, 여성과 노인도 동참했다. 마산에서는 할머니 3000명이 호미와 방망이를 들고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자식 같은 학생의 죽음에 대한 분노가 서린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대통령 물러가라”는 구호가 분명하게 요구하는 바는 이승만 퇴진이었다.

산수(山水) 이종률은 이날들을 3·4월민족항쟁이라 일컬었다. 산수는 민족혁명의 큰길에 일생을 바친 이다. 4월혁명 이후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를 결성하여 통일운동을 전개하다 군사혁명특별재판소에서 사형을 구형받고 10년형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했다. 민족음악과 인간음악, 즉 민인음악(民人音樂)을 논한 옥중수고가 여럿 전한다. 산수는 대중들이 기세 높여 즐겨 부를만한 대중적·항진적 노래를 민인음악의 본질로 보았다. 그가 직접 가사를 쓴 <3·4월의 노래>가 본보기다. “울림의 억센 가락 마산의 3·15/ 사자는 일어섰다 함성은 높았다/ 안밖으로 연결된 무리들의 불의에/ 던저진 돌물결은 널리널리 퍼졌다/ 아―! 3, 4월 뿌린 피를 여기 살려 빛내자/ 아―! 3, 4월 뿌린 피를 여기 살려 빛내자.” 전남 해남 출신으로 해방기 부산에 정착하여 동래고, 부산상고 등에서 교사로 일했던 작곡가 유신이 여기에 곡을 붙였다. 묵직한 저음부에서 고음부로 날카롭게 도약하면서 민인의 항진을 표현한 노랫말을 또렷하게 전달한다. 어김없이 4월이다. 3, 4월에 뿌린 피와 노래는 오늘도 항진 중이다. 민주의 제단에 바친 피의 가치를 거듭 되새겨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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