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국방 인in人] 13. 조선시대 화약무기 소화기 부대가 있었다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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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화성행차도에 등장한 포수. 어깨에 조총을 걸치고 있는 조선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정조의 화성행차도에 등장한 포수. 어깨에 조총을 걸치고 있는 조선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고려시대에도 화약무기를 운용하던 부대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1104년 여진 정벌을 위한 별무반의 11개 특수 부대 중 '발화' 부대가 존재했는데 발화라는 명칭으로 봐서 화기부대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다른 의견도 엄연히 존재한다. 1136년 고려 인종 때 묘청의 난을 진압하면서 화구를 만들어 석포로 발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구의 존재가 화약무기 가능성이라는 주장도 있다.

고려말 최무선이 누선 80척을 건조하고 화통과 화포를 비치해 진포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뒀는데 함포를 사용해 승리한 최초의 해전이라고 노영구 국방대 교수는 말한다.

조선 태종은 1401년 최무산의 아들 최해산을 군기감 주부로 임명하고 화약무기 제조를 총괄하도록 했다. 1404년 최해산이 만든 화약무기를 다루기 위한 별군이 창설됐다. 화기 제조를 돕는 병종인 화통군도 400명으로 증원해 운영한 것으로 봐 조선 초기 전문 화약무기 관련 부대라고 할 수 있다.

세종대 화약무기 기술이 발전하면서 화통군은 역할이 두드러졌다. 세종 15년인 1433년 편찬된 진법서 계축진설에는 '조운진'이라는 진법이 소개돼 있다. 여기에 화약무기를 다루는 화통궁수가 중요 역할을 하는데, 이는 화약무기인 화통을 가진 군사가 기존의 궁수와 동등하게 운용됐다는 증거라고 노 교수는 말한다.

세종 27년인 1445년 화약무기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병종인 총통위가 창설됐다. 병력은 무려 2400명에 이른다. 총통위는 800명씩 6개월마다 3교대 근무를 하는데 3년 만에 4000명으로 증원했다.

신기비결을 바탕으로 그린 조선의 화약무기. 신기비결을 바탕으로 그린 조선의 화약무기.

세종 30년인 1448년 편찬한 총통등록은 화약 무기의 사용법과 규격을 정한 책이다. 이 책을 바탕으로 화포 주조 감독관이 각지에 파견됐는데 조선의 독자적 화약무기가 전국에 전파하는 계기가 된다.

세조 후반기인 1467년 함길도에서 이시애가 난을 일으켰다. 이시애는 북방 화약 무기로 무장하고 난을 일으켰는데 결국 총통군 등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세조는 이시애의 난을 겪은 이후 총통군을 해체한다. 이에 대해 노 교수는 총통군의 해체를 달리 봐야 한다고 말했다. "화약 무기의 위력을 알았기 때문에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에서 해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약 무기를 다루는 특수한 병력의 보편화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노 교수는 "역사적 사실은 단순하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정세를 제대로 봐야 한다"며 "조선 초기 화약무기 운용 부대의 보편화가 맞다"고 말했다.

선조 16년인 1583년 두만강 이북 여진족이 니탕개의 난을 일으킨다. 조선군은 승자총통으로 무장하고 여진족을 물리친다. 강력한 개인화기인 승자총통은 이후 임진왜란에서도 맹활약한다. 조선군은 개인화기인 승자총통을 다루는 병사를 운용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 의주로 몽진한 선조는 1593년 한성으로 환도하면서 비변사(군국기무를 담당하던 문무합의기구)에 지시해 훈련도감을 창설한다. 훈련도감은 한성의 기민(굶주린 백성)을 모아 군대를 편성했다. 최초 모집한 군사는 500여 명으로 포수와 살수가 주력인 군대였다. 이전까지 조선의 군인은 병농일치의 원칙이었다면 훈련도감의 창설은 급료병 제도가 등장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훈련도감은 궁시 중심의 조선군이 조총과 총통 등 화약무기와 단병무기를 중심으로 하는 전술 체계의 단적인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기병 중심이던 조선의 전술 체계가 보병 중심의 전술 체계로 완전히 변화한 것이다.

지방군도 달라졌다. 평안도, 황해도, 충청도 등지에서 각각 포수 수백 명이 양성됐다. 노 교수는 "선조 29년인 1596년 평안도의 영변, 안주, 귀성, 의주 등 진관 4곳의 속오군 편성을 알 수 있는 문서 '진관관병편오 책'을 보면 새로운 병종인 포수와 살수의 비중이 전체의 52%에 이른다"며 "임진왜란 발발 후 4년이 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조선의 지방군 편성이 포수(조총병)와 살수 중심으로 급변했음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1649년 제작된 보석사 감로왕도에 등장하는 포수(조총병). 받침대가 있는 것으로 보아 1.5m가 넘는 대형 조총이거나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태창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649년 제작된 보석사 감로왕도에 등장하는 포수(조총병). 받침대가 있는 것으로 보아 1.5m가 넘는 대형 조총이거나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태창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선조 40년 평안도 감영의 교련청에서 사용한 병서를 보면 조총을 사격하는 '총수대'는 대마다 1~2명으로 한 층을 이뤄 5~10차 연속 사격이 가능하도록 편제했다.

광해군 5년 조총청이 화기도감으로 확대 개편된다. 포수의 양성과 다양한 화기를 활용하는 전술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광해군 10년인 1618년에는 각도에 수천 명의 포수가 확보됐다. 아울러 조총의 연속 사격 훈련도 정기적으로 진행되었다. 포수의 비중은 갈수록 확대됐다.

인조대 어영청 호위청 등 군영의 창설도 화약무기와 관련이 있다. 당시 포수와 살수를 통합하여 운용한 전술을 가늠케 할 수 있는 17세기 조선의 군사교범 '병학지남'에 따르면 조총병 운용이 매우 체계적임을 알 수 있다.

'적군이 100보 안으로 들어오면 신호포를 쏘고, 신호포와 나발을 불면 조총수는 일제히 발사한다.'

인조 17년 어영군의 번상(지방의 군사가 번을 치르기 위해 번에 따라 서울로 올라와 근무하는 것) 군사 100명 중 포수와 살수가 각각 절반 씩이었는데, 사수는 포수로 전환하고 살수는 폐지했다. 이런 결과 인조 26년 함경 감영의 군병 8000명 중 포수가 4000명에 달했다.

조선 효종 때인 1658년 흑룡강 일대로 남하한 러시아군을 저지하기 위해 조선의 조총 부대가 출격한다. 청의 요청에 의해 파견된 조선의 조총부대는 러시아군을 섬멸하며 나선정벌의 전설을 만들었다.

효종 9년 어영청에 설치한 별파진은 화약장과 대포를 다룰 줄 아는 군병으로 전투병을 편성하고 보조 인원까지 뒀다. 노 교수는 "100보 정도에 불과한 조총 유효사거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렇게 편성한 것으로 보인다"며 "17세기 중반 이후 조총병 중심으로 조선군을 편제한 것은 화약 무기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이뤄진 것으로 상비군제 등을 통해 수도의 경제적 발전도 가능하게 해 한성이 독자적인 경영이 가능한 근세적 상업도시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조총병 운용은 19세기 말 조선이 신식군대 체계를 도입한 시기까지 이어졌다.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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