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의 인사이트] “정치에 무슨 품격…”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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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더불어민주당 윤호중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0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대통령 취임 외빈 초청만찬에서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와 한담하면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윤호중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0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대통령 취임 외빈 초청만찬에서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와 한담하면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매년 5월이면 어김없이 국립대전현충원을 찾는다.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제2묘역에서 위쪽으로 걷다 보면 좌우로 천안함 46용사 묘역, 제2연평해전 전사자 묘역이 펼쳐져 있다. 어디에선가 트럼펫 진혼곡 소리와 함께 흐느낌이 터져 나온다. 그 슬픔 쪽으로 감히 고개조차 돌리지 못한다.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6·25 전쟁 이후 72년, 일제 강점 이후 112년. 시대도 이념도 배경도 다르지만, 저분들의 피와 눈물, 회한과 애국심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떠받치고 있다.

13만 8000여 영령을 품고 있는 100만 평 대전현충원 묘역은 단아하다. 흔한 잡초 하나 없이 깔끔하게 다듬은 봉분과 묘역의 잔디밭, 자원봉사자가 수시로 닦은 비석, 가지런히 꽂힌 조화를 보노라면 옷깃부터 여민다. 잔디 봉분과 비석만으로 희생에 보답하기에는 가당치도 않지만, 현충원에서 느낀 ‘국가의 품격’이 대한민국 사람이란 것을 뿌듯하게 한다. 한글을 지키려다 옥사한 선열들이 오늘날 방탄소년단의 한글 가사 노래를 세계인이 흥얼거리는 모습에 “내 새끼들 장~하다”면서 환하게 웃으실 듯하다.


현충원 눈물·마음이 대한민국 떠받쳐

선진국, 국가의 기품 위해 노력

한국 정치, 국가 브랜드 갉아먹어

가는 대통령에 대한 예우도 상식 이하

소용없는 복수에 함몰돼 내전만 거듭

통합·배려·대화로 국가의 품격 높여야


국립대전현충원에서처럼 국가도 개인도 갖춰야 할 위엄과 기품이 당연히 필요하다. 선진국은 국가의 품격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나라이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가 달포 이상 지난 한국 정치판은 “정치에 무슨 품격…”이라면서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자기편은 선, 상대편은 악’이라는 진영 싸움 깃발 아래 멱살잡이는 일상이다. 진영 내에서는 성추문마저 횡행하는 처지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작심 비판했던 ‘4류 정치’는 27년 뒤인 오늘 ‘5류 정치로 역주행’(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한 형국이다.

민간부문의 국가 브랜드를 갉아먹는 저질 정치는 지난 10일 각국 축하사절단과 정·재계 인사 등 내외빈 160여 명이 참석한 대통령 취임 기념 만찬에서도 드러났다.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윤석열 대통령의 배우자 김건희 여사와 만나 함박웃음을 짓자, 민주당 동료로부터 “진짜 바보인가” “웃음이 나오냐”라는 비아냥이 쇄도했다. 주빈인 거대 야당 대표 정치인의 미소가 비난거리가 되는 게 한국 정치다. 정책과 예산을 놓고 독하게 싸우더라도, 국가 만찬 그 순간은 환한 미소가 기본이다.

가는 대통령에 대한 예우도 상식 이하다. 공식 임기 마지막 날 밤, 집도 절도 아닌 곳에 내쫓기듯 보내는 것도 민망한 일이다. 후임에게 성공과 당부의 손 편지를 남기고 가는 미국 백악관의 관행은 기대하지도 않지만, 정권교체기 한국 신구권력의 드잡이질은 ‘역시나’라는 절망만 안겼다. 천년고찰 통도사 인근 고즈넉한 평산마을에 난데없는 욕설과 확성기 소음도 세상에 낯부끄러운 일이다.

19세기 영국 철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인간이 그저 자신의 쾌락과 행복만을 추구한다면 동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품격이 있는 사람들은 타인을 생각하고 배려할 것이고 이러한 감정이 인간으로서의 품격”이라고 지적했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포용이 우아한 사회를 만들고, 곧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국가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척도다. 갈등 없는 민주주의 국가는 찾기 어렵지만, 한국 정치판처럼 상대편을 굴복시켜야 하는 적으로 본다면 ‘폭력적 해결 방식’만 남게 된다. 대화와 포용을 통한 해결은 불가능하다. 본인과 지지층에게도 평생 앙금을 남기고, 역사에서 보듯 어떤 계기가 생기면 폭발한다.

이 시점에 “민주주의에서는 여당과 야당이 서로 대화해야 하는데, 한국 정치는 복수에 함몰돼 내전을 벌이고 있다”라는 프랑스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의 지적에 얼굴조차 들기 힘들다. 이승만 시대 한국 정치를 보고 “별 의미도 없는 소용돌이 같은 정치 투쟁 때문에 나라에 남아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갈파한 미국 역사학자(그레고리 헨더슨)의 회고가 지금도 여전한 것 같아 민망하다. 그나마 16일 국회 본회의장 시정연설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민주당 측에 허리 굽혀 인사하고, 민주당이 기립박수 하는 모습에서 협치와 포용, 배려와 희망의 미래를 잠시 엿보았다. 하지만,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여야 대치 정국은 천길만길 나락이다. 그 피해는 오롯이 국민이 볼 수밖에 없다.

선진국은 높은 연봉과 비싼 아파트만으로 될 수 없다. 국립대전현충원에서처럼 서로 다르지만, 국가를 위한 한결같은 마음이 합쳐진 우아함이 그 본질이다. 정치인들이 철마다 찾아와 헌화하며 고요함을 깨는 대신, 배려와 포용으로 스스로 우아해져 국가의 품격을 올리는 모습이 선열께 보답하는 길이다. 분열하고 역주행할 것인지, 포용하고 도약할 것인지 그 갈림길에 한국 정치가 서 있다. “우리 후손들 정말 장~하다”는 선열들의 함박웃음을 꿈에서라도 보고 싶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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