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식권총, 대한식소총의 산실 부산조병창[자주국방 인in人] 14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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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최윤관 학예연구사가 국산 대한식소총과 광복식권총을 설명하고 있다. 이재희 기자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최윤관 학예연구사가 국산 대한식소총과 광복식권총을 설명하고 있다. 이재희 기자

[자주국방 인in人] 14. 부산은 소화기 제작 중심 도시였다


최초의 국산 제식소총 M16을 만든 국방부 조병창 도미기사단의 관록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한국 소화기 제작의 맥이 부산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을 부산 부산진구 서면에 있었던 부산조병창(대한금속회사·국군 제1조병창)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산조병창은 대한식소총과 국산 광복식권총인 45구경 콜트 권총 생산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조선시대 군기시에서 승자총통과 조총을 만들던 조상의 기술은 구한말까지 이어졌고, 일제강점기란 암흑기를 지나 부활하기 시작했다. 자주국방의 기치를 다시 세우는 지점에 '부산'이라는 지역이 특히 돋보인다. 부산조병창으로 말미암아 부산은 국산 소화기 제작의 중심 도시로 불릴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하다.

1952년 국군 제1조병창(부산조병창)에서 태극 문양을 선명하게 새긴 최초의 대한민국 제작 대한식소총을 만들었다. 또 미국 콜트사의 45구경 권총을 광복식권총이란 이름으로 국산화했다. 살펴보면 부산조병창은 우리 손으로 만든 M16과 K2 소총을 가능케 한 원천이 아닐까. 부산조병창의 존재로 부산이 대한민국 소화기 생산의 뿌리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국군이 국군에게' 전쟁기념관 국군무기 전시실 입구의 조형물. '국군이 국군에게' 전쟁기념관 국군무기 전시실 입구의 조형물.

평화의 아이러니 일제강점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는 한동안 국가 간 대형 전란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른바 평화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제국의 각축전이 벌어지던 서방과 달리 조선은 고요했다. 그러나 이 조용함은 소형화약무기의 발전마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조선의 조총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진일보했다.

노영구 국방대 교수는 출간을 앞둔 저서 '한국의 전쟁과 과학기술 문명'에서 병자호란 이후 발전한 조선의 조총에 관해 언급했다. 노 교수는 "병자호란 이후인 인조 26년(1648년) 10월 조선은 남만조총 제조를 시도했다. 남만조총은 가볍고 사정거리가 길며 연속 발사가 가능했다"며 "남만조총 제작을 시도한 지 8년 만인 효종 7년(1666년) 네덜란드인 박연(벨테브레) 등의 역할로 남만조총을 완성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신형 조총은 서구의 수석식(플린트락·부싯돌 점화)은 아니지만 기존 화승식(매치락·불을 댕기는 방식) 조총을 개량한 것으로 보인다고 노 교수는 밝혔다. 조총의 기술적 진보는 지속돼 현종대에는 일본의 우수 조총과 성능이 거의 비슷해졌다. 제작 기간과 단축돼 활을 생산하는 것보다 빨라져 대량 보급도 가능했다. 그러나 평화 시기가 이어진 관계로 조총의 발전은 딱 거기까지였다.

1871년 미군이 강화도를 침범한 신미양요 때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의 화승식 조총은 남북전쟁 등으로 단련된 미 해군의 스프링필드 M1861 전장식 라이플을 당해내지 못해 참패했다. 조선군은 화승총과 홍이포로 무장했지만, 미군은 대형 함포와 스프링필드 소총으로 우리를 압도 했다. 스프링필드 소총의 유효사거리는 화승총의 3배나 됐고, 연발 사격할 수 있었다. 무기에서 서구에 밀린 조선은 열강에 의한 강제 개항과 더불어 급기야 일제에 강점까지 당하는 민족의 시련을 겪는다.


함양 출신 의병장 전성범의 장총. 부산광복기념관이 총열만 남은 유물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다. 부산일보 DB 함양 출신 의병장 전성범의 장총. 부산광복기념관이 총열만 남은 유물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다. 부산일보 DB

화승총과 대한제국 시기 소총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농민군은 일부 화승총만 보유하고 싸웠는데 일제는 무라타 소총과 개틀링 기관총,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으로 동학군을 학살했다. 화력의 절대적 열세였다.

1897년 10월 12일, 조선이 제국을 선포하며 전제군주제 국가인 대한제국이 탄생한다. 신식 대한제국군은 독일제 모제르 소총과 러시아제 베르당 소총을 수입해 사용했다. 그러나 열강의 각축 속에서 제국을 지탱하지 못하고 나라가 망하는 와중인 1907년 군대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다. 군대 해산 이후 군인의 다수가 의병이 된 것으로 역사가들은 보고 있다. 이 군인 출신 의병들의 주력 소화기가 독일·러시아제 소총이었다. 일부 독립군은 제정 러시아가 개발한 5연발 모신나강 소총을 사용하기도 했다.

1920년 그 유명한 청산리 대첩에서 모신나강 소총 등을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모신나강 소총은 1920년대부터 광복 때까지 만주와 연해주 등에서 활약하던 독립군의 주력 소총으로 사랑받았다. 모신나강은 러시아인 모신이 개발한 총에 벨기에인 나강 형제가 탄창을 설계해서 붙은 이름이다. 영화 밀정에서 스나이퍼 안옥윤이 사용한 총도 모신나강 소총이었다.

한편 일제는 1905년 38식소총(아리사카 소총)을 생산한다. 메이지 38년(1905년)에 채용된 소총이라서 38식이다. 1939년엔 38식 소총의 구경을 7.7mm로 키운 99식소총을 개발한다. 99식소총은 일본 황기 2599년(1939년)에 만들기 시작했다고 99식이란 명칭이 붙었다. 38식과 99식소총은 일본 육군조병창에 소속된 아리사카 나리아키라가 만들어 아리사카 소총으로 불린다. 이 총들은 조선의 독립군과 악연이었다. 일제의 주력 소총이었기 때문이다.

독립군에게는 비록 모신나강 소총이나 모제르 소총이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 화승총이었다. 단발식 화승총은 일제의 현대식 소총을 당해내기 역부족이었다. 광복이 임박해서야 미군의 M1 카빈소총이 등장한다.

1945년 광복군 특수요원들이 미군 첩보부대의 훈련을 받는다.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광복군 노능서, 김준엽, 황준하 선생이 소총을 들고 기념 촬영을 했는데 그 총이 미제 M1 카빈소총이다. 아쉽게도 그 총은 일제의 갑작스러운 항복으로 쓰임새를 다하지 못했다.


영화 <암살>에서 주인공 안옥윤이 사용한 모신나강소총. 부산일보DB 영화 <암살>에서 주인공 안옥윤이 사용한 모신나강소총. 부산일보DB

대한민국의 여명이 밝아온다

"일제는 조선을 합병하며 총포화약류를 엄격하게 금지했습니다. 19세기 무렵 조선에는 화승총이 흔한 무기였는데 10만 정 이상 압수해 소각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전쟁기념관 최윤관 학예연구사는 일제의 총포화약류 금지 정책으로 일제강점기 민간에서는 총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아무래도 의병 등의 항일무장투쟁에 두려움을 일제가 정책적으로 취한 행동이다.

최 학예사는 1930년대 일본에 조병창 있었고, 한국에도 별도의 조병창을 운영하며 38식과 99식소총을 생산했다고 했다. 물론 당시 일본 이외에서 만든 소총은 민간에서 공수한 쇠붙이 등으로 만들어 성능이 뛰어나지는 않았다고 했다. 당시 일제가 운영하던 인천 부평구 인천조병창에는 한국인 기술자가 많았다. 일제는 총기 생산 노하우가 전수될 것을 우려해 철저히 점조직 형식으로 총기를 생산했다고 했다.

"소총 제작 전 과정을 한국인은 절대 알지 못하도록 공정을 분리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부분 기술을 배운 이들이 해방 후 우리식 총기를 만드는데 일정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최 학예사는 인천조병창을 관할하던 국방부 병기행정본부 초대 본부장이 일본 육사 출신의 채병덕 소장이었고, 인천조병창이 국군 조병창으로 창설할 때 일제강점기 조병창에서 근무한 기술자를 채용했다고 밝혔다.

인천시 부평역사박물관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유물이 있다. 부평역사박물관 손민환 학예연구사는 "박물관이 민간에서 입수한 '국방부 조병창 인천공장 자료'를 살펴보던 중 일제강점기 조병창 자료가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 이후 인천조병창의 연혁을 알 수 있는 주요 자료가 있었다"고 소개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부산조병창에서 만든 대한식소총과 광복식 콜트 권총. 대한민국 수립 이후 부산조병창에서 만든 대한식소총과 광복식 콜트 권총.

부산에는 제1조병창, 인천에는 제2조병창

부평역사박물관의 1950년 12월 제작된 '본부장각하 초도순시안내도' 문건에 따르면 인천 제2조병창 연혁을 알 수 있다. 손 학예사가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일제 기업인 조선유지주식회사 인천화약공장이 인천 제2조병창의 전신이다. 조선유지는 1937년 인천 일대에 착공해 1942년 준공했다. 다이너마이트 등을 제조했는데 종업원은 620명 정도였다. 일제 패망 후 적산으로 남은 기업을 국방부가 1948년 12월 8일 접수했다.

초대 공장장은 육군 중위 정낙전으로 장교 3명과 임시문관 71명이 업무에 착수했다. 조병창 시설의 복구와 확충, 관련 기술자 초청을 통해 무연화약과 수류탄, 지뢰, 폭탄 등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1949년 제2대 창장인 육군대위 김영생 창장이 부임했다. 같은 해 타격식 수류탄 제작했는데 폭발 시험 도중 시험원 2명의 손이 절단되는 사고도 발생했다. 그렇지만 그해 5월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시험에서는 타격식 수류탄을 격발식으로 개량해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했다. 이날 시험에는 총참모장도 참석했다고 한다.

인천조병창에서는 주로 화약을 활용한 무기를 생산했다. 같은 달 대인지뢰와 대전차지뢰 시제품 실험했고, 한국사 최초로 무연화약공장건설에 착수 7월 10일 시제품을 생산했다고 한다. 1950년 무연화약생산과 병행해 1월부터 소총 탄환 생산 설비를 준공해 매월 최고 60만 발을 생산하는 설비를 갖췄다고 했다. 6월 15에는 국방부 제2조병창으로 승격하여 사업독립성을 부여받았고, 한국전쟁으로 약 3개월 공산치하에서 각종 시설이 파손된 것을 10월 9일 귀창과 동시에 각종시설을 복구했다고 했다.

이에 비해 제1조병창인 부산조병창의 기록은 많이 알려진 바 없다.

1952년 발생한 부산진 대화재 관련 언론 기록에 따르면 부산조병창은 대한금속회사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부산조병창에서 부품을 가공해 만든 광복식 콜트 권총. '부진제(부산진조병창에서 제작)'와 '광복식' 각인이 선명하다. 부산조병창에서 부품을 가공해 만든 광복식 콜트 권총. '부진제(부산진조병창에서 제작)'와 '광복식' 각인이 선명하다.

45구경 콜트 '광복식' 권총

전쟁기념관 최 학예사는 미군정기 국내에는 일제가 남긴 무기뿐만 아니라 미국제 무기나 수리 부품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부산조병창(부산진조병창)에서 각종 부품을 활용하자는 생각에서 광복식권총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시험 생산이었기에 많아야 500정을 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광복식권총은 현재 전쟁기념관에서 4정이 소장하고 있고, 육군박물관에 1정이 있다. 해외 희귀총기류 경매 사이트에서 10정 정도가 노출됐는데, 연번으로 보면 현재까지 300번 대가 최고 숫자라고 했다.

최 학예사는 광복식권총을 연구하다 보면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고 했다. "처음엔 총신 등 단순한 부품만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살펴보니 권총의 핵심 부품인 총열은 물론 스프링도 우리 기술로 제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 학예사는 정밀부속은 당시 대한민국의 기술로는 만들 수 없을 것으로 예단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수가공으로 미국제 부속을 능가할 정도로 만든 것은 한국 기술자들의 기술이 대단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광복식권총은 지금도 사격이 가능할 정도로 잘 만들었다고 말했다.

광복식권총의 총신에는 'ㄱㅗㅏㅇ.ㅂㅗㄱ.ㅅㅣㄱ' 명문과 함께 'ㅂㅜㅈㅣㄴㅈㅔ'라는 명문이 선명하다. 최 학예사는 “광복식권총은 콜트 권총의 일부 부품을 생산해 기존 부품과 결합하는 방식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부산조병창에서는 주로 총신 윗부분이나 슬라이드, 프레임을 주물과 단조로 만들어 결합한 후 완성했다는 것.

비록 모든 부품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에서 제조한 광복식권총은 그 존재 자체로 충분한 의의가 있다. 광복식권총을 소개한 적이 있는 국방부 블로거 동고동락은 "부진제 국산 권총은 우리 군이 비록 초창기 아무것도 없었던 시절에도 '우리 무기는 우리의 손으로'라는 민족적 자주국방의 의지가 강했던 것을 말해주는 한 심벌이다"고 평가했다.

아쉽게도 광복식권총은 500정 정도를 끝으로 더는 생산되지 못한다. 블로거 동고동락은 부산진조병창에서 근무했던 이의 증언을 빌어 '처음엔 급박한 국내 수요에 의해 한국에서 생산하다가 이후 미국 본토로부터의 공급이 원활해지자 미군이 제조를 중단시켰다'고 주장했다.



전쟁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대한식소총 4호와 7호. 태극문양이 선명하다. 전쟁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대한식소총 4호와 7호. 태극문양이 선명하다.

태극 선명한 대한식 소총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국산 무기의 필요성을 느낀 정부는 일제 99식소총과 미군 M1 등의 특장점을 살린 국산 소총을 개발하는데 이것이 1952년 만든 대한식소총이다. 육군박물관의 대한식소총은 최근 국가중요자료로 지정됐다.

최 학예사는 전쟁기념관에는 대한식소총 4~7호 등 모두 4정의 유물이 있다고 말했다. 4호와 7호는 불과 몇 달 차이지만 볼트 부분이 호환되지 않는다고 한다. 짧은 기간임에도 적극적인 개발 의욕이 작동한 것이라고 최 학예사는 분석했다.

대한식소총의 탄창은 반자동사격이 가능한 M1과 유사한데 8연발이 가능하고 클립은 눌러야 빠지는 수동구조다. 디자인 측면에서는 총구와 가늠쇠, 총몸은 일제 99식소총을 참고했고, 코킹핸들 등은 엔필드 M1917과 M1 개런드를, 개머리판과 급탄 구조는 M1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한식소총은 전 세계 통틀어 우리나라에만 있는 무기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발한 소총이라는 점이 큰 의미가 있습니다." 최 학예사는 한국전쟁 와중에 국산 소총을 개발하려던 시도를 했고, 시제품을 시험까지 했다며 태극 문양을 새긴 것은 소총 개발을 통해 자주국방의 염원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비록 미군의 M1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일제 99식소총보다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대한식소총은 휴전 후 미국으로부터 양도받은 다량의 M1 소총으로 인해 국군의 제식소총으로는 채택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광복식권총을 분해조립하고 있는 전쟁기념관 최윤관 학예사. 광복식권총을 분해조립하고 있는 전쟁기념관 최윤관 학예사.

필요성이 적극적인 개발 자극

"대한식소총은 미국이 한국전쟁 당시 대량 제공한 M1소총은 언제라도 가져갈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개발을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최 학예사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전쟁은 종전이 아니라 휴전되었고, 따라서 미군이 대여한 M1은 국내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고 했다.

"휴전 당시 40만 정의 M1과 카빈 소총이 국내에 있었습니다." 전쟁이 한창인 1952년 김해시로 장소가 추정되는 탄약시험장에서 대한식소총의 시험사격이 있었다. 시험 결과 대한식소총은 호평받았다. 하지만 미군이 대여한 대량의 M1소총 등은 대한식소총의 추가 개발에 걸림돌이 됐다. 대한식소총은 최종적으로 100정 정도만 생산된 것으로 최 학예사는 보고 있다.

"대한식소총은 독창성이 있습니다. 단순히 기존 소총을 카피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공급이 원활했던 미군 M1 소총의 탄창을 쓰기 위해 무진 애를 썼고요. 볼트 액션식 소총에는 없는 수동으로 클립을 배출하는 기능도 넣어 M1 8발 클립을 그대로 썼죠. 총몸도 깎아 99식소총과 결합하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유물보존학 석사를 마친 최 학예사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동네 형이 가지고 있던 장난감 총기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고 했다. 군 복무 때도 총기 수리 관련 업무를 했고, 요즘도 각종 모형 총기류를 수집하고 연구한다는 최 학예사는 부산 해운대에 있던 실탄사격장에서 아르바이트도 한 이력이 있는데 자신을 '취미가 성공한 덕후'로 부를 정도로 총기류 관련 지식이 뛰어났다.

"살펴보면 대한식소총은 총에 관한 이해도가 높은 기술자가 만들었습니다. 총기를 제작해 본 기술자가 만들었다는 얘기죠" 최 학예사는 "대한민국이 환란 속에서도 독자적인 무기 개발이 가능한 원천 기술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유물"이라며 "특히 콜트 권총을 생산한 부산조병창에서 대한식소총이 탄생했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고 말했다.


전쟁기념관 국군무기 전시실에 있는 K2 국산소총 개발 시제품 XB시리즈. 이 소총은 모두 SNT모티브에서 생산했다. 전쟁기념관 국군무기 전시실에 있는 K2 국산소총 개발 시제품 XB시리즈. 이 소총은 모두 SNT모티브에서 생산했다.

여러분은 힘을 기르소서

대한민국이 대한식소총 이후 다시 국산 소총을 개발하기 시작한 것은 1971년 11월이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미국 M1 개런드 소총과 카빈 소총 등을 역설계 방식으로 소총을 단기에 시험 생산한 적이 있다.

1972년말부터 국방과학연구원 주도로 국산 소총 개발이 지속해서 진행됐다. 이 프로젝트는 12년 동안 여덟 가지 모델을 시험하며 마침내 1984년 K2 소총을 만들었다.

이때 시험용으로 만든 소총이 XB 시리즈다. 이 모델은 전쟁기념관 3층 전시실에 당당하게 전시돼 있다. 당시 M16 국산화가 이미 이루어진 상태라 국산 소총 개발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굳이 성능이 떨어지는 국산 소총을 개발할 필요가 있느냐는 일부의 비판적인 시선도 있어 개발자들의 의욕을 꺾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꿋꿋하게 국산 소총 개발을 지속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기술자들은 명실상부 진정한 국산 소총을 완성했다.

국산 무기류를 전시하는 전쟁기념관 3층 전시실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씀이 걸려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은 힘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의 목적을 달하려는 자는 먼저 그 힘을 찾을 것이다. 내가 이에 간절히 부탁하는 바는 이것이외다. 여러분은 힘을 기르소서. 힘을 기르소서."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다.' 이것이 자주국방이다.


요산 김정한 선생은 1973년 11월 29일 국방부 조병창 건립 기념 비문에 이렇게 새겼다. '국방은 한 나라의 존립을 보장하는 최대의 요건. 방비를 등한히 해 외적의 침략을 받았던 치욕스러운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말자. 여기 자주국방을 다짐하는 무기 생산의 터전을 마련했다. 우람한 가동 소리는 조국의 영원한 안전과 자유를 굳건히 보장하리라.' 선생의 말씀을 축약했지만 대한민국 자주국방의 시원이 부산 기장군 철마면 전 국방부 조병창이다. 조병창은 (주)대우정밀로 민영화한 뒤 현재 SNT그룹(회장 최평규)의 SNT모티브로 발돋움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자주국방의 대의는 면면히 이어진다. 그 거룩한 여정에 묵묵히 복무한 이들을 발굴해 <부산일보>는 ‘자주국방 인in人 시리즈’를 지면과 온라인에 연재한다. 모든 영웅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를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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