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애써 지우지 않아도 되는 마음
영화평론가
그 흔한 스킨십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 나누지 않는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땐 그들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진사 정원이 담담히 준비하는 마지막의 의미도, 죽음 앞에 찾아온 사랑도 어쩐지 동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십 년이 훌쩍 지나고 본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동화라기보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들이 담겨있어 눈시울이 붉어졌다. 영화에는 사랑뿐만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작은 동네에서 낡고 오래된 사진관을 운영하는 ‘정원’은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밤마다 통증으로 고통스러운 밤을 보낼지언정, 아침이 밝아오면 언제 아팠냐는 듯 다시금 평온한 모습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정원의 삶은 특별히 비극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어제와 다르지 않게 오늘을 살아가고 있으며, 자신이 사라질 자리를 하나 둘 정리하며 내일을 기다린다. 미련은 없지만 어쩐지 무료한 날을 보내던 정원 앞에 햇살같이 밝은 ‘다림’이 나타난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에 지쳐가던 주차 단속요원 다림은 단속 차량 사진의 인화를 맡기기 위해 드나들던 사진관에서 정원을 만나며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된다.
절제된 연출 ‘8월의 크리스마스’
시한부 선고 받은 남자의 사랑
신파로 흐르지 않게 담담히 그려
부자 관계 등 다양한 감정 묘사
다림은 정원에게 놀이공원에 가자고 데이트 신청을 하고, 정원의 팔짱을 스스럼없이 껴보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어느새 두 사람은 일상을 공유하는 사이로 발전하지만 정원은 미래가 없는 자신의 처지로 주저한다. 그렇다고 끌리는 마음을 밀어내지도 못하지만 말이다. 영화에는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들이 조금씩 거리를 좁혀가는 애틋한 장면들이 많다. 여름비가 내리는 날, 정원과 다림이 한 우산을 나눠 쓰고 걷는 롱테이크 신과 아이스크림을 서로 나눠 먹는 장면은 여전히 회자될 정도로 아기자기하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남자의 사랑 이야기라고 해서 신파 영화가 아니다. 담담하고 느리게 절제된 연출로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마주하게 만들며, 죽음과 더불어 일상도 함께 담아내고 있다. 이때 정원은 자신의 죽음을 마냥 기다리는 수동적인 인물은 아니다. 정원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기도 하고, 혼자 남게 될 아버지가 걱정되어 신경질도 부린다. 순간 순간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감정을 드러내며 후회하기도 한다. 다림의 경우도 연락 두절된 정원이 야속해 사진관 유리창에 돌을 던지며 속상함을 행동으로 표현한다. 영화는 일상 속에 죽음을, 슬픔과 분노와 무수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허진호 감독은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감정들을 일상 속에서 불러온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정원은 자신이 죽고 나면 홀로 남을 아버지에게 VCR 작동법을 가르쳐주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불현듯 화를 내지만 이내 방으로 들어간다. 다음날 정원은 VCR 작동하는 법을 상세히 적은 종이를 남겨두고 나오는 것으로 아버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아름다운 순간도 언젠가는 지나가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것을 붙잡을 수 없기에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추억한다. 정원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들을 카메라에 담아두기 시작한다. 먼저 환하게 웃는 다림의 증명사진을 찍어준 후, 자신의 영정 사진을 남긴다. 잊고 싶지 않은 다림의 얼굴을 기억하며, 자신의 마지막 얼굴 또한 빛나는 웃음으로 마무리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무덥던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온다. 다림은 정원의 사진관 앞에 걸린 환하게 웃는 자신의 사진을 보며 방긋 웃는다. 정원과 보낸 짧은 시간을 슬픔이 아닌 아름다운 추억으로 마음속에 묻어두었음을 알려주는 예쁜 미소다. 어떤 기억은 자연스레 사라지기도 하지만 굳이 애써 지우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영화는 느린 속도로 알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