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여름, 그리고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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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아 소설가

아, 어쩌면 굳이 픽션이 필요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현실 자체로도 충분히 무섭고 두려울 때가 있으니까.
변이 바이러스, 치솟은 물가, 대기업과 부자들의 세금 감면….
픽션과 현실, 올여름의 공포물로 어느 것이 더 무서울까.

평소 장르문학을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여름이 되면 어쩐지 추리, 스릴러, 호러 같은 장르소설을 좀 읽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중학교 때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더위를 잊었던 기억 때문일까.


그런 기분으로, 좀처럼 손대지 않던 장르소설을 한 권 읽었다. 부커상 최종 후보로 올라가 유명세를 얻은 소설집이었다. 한 맺힌 저주로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나가고, 변기에서 사람 머리가 올라오고, 지하실에 있는 어린 유령과 대화하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책을 덮고 나서도 계속 생각나는 단편 하나 때문에 오래도록 으스스했다. 자동차 사고 직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하나에만 의존해 판단력을 잃게 되는 한 인물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었다. 다른 소설들에 비하면 딱히 자극적인 소재도 없었는데 생각할수록 이상하게 무섭고 가슴이 선득해졌다. 작품 속 인물을 지배하는 불안과 공포에 나도 속수무책으로 휩싸여 버린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의 원인은 저마다 다르다. 나에게는 별것 아닌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거의 죽음에 맞닿는 두려움이 되기도 한다. 나는 높은 곳에 대한 공포가 없는 편이어서, 고소공포증을 가진 사람들이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의 느낌을 잘 알지 못한다. 남편과 데이트를 하던 시절 놀이공원에서 관람차를 탄 적이 있었는데, 관람차가 위로 올라갈수록 그는 내 팔을 점점 꽉 잡았다. 처음엔 애정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갈수록 하얗게 질려갔다. 그에게 관람차는 로맨틱하고 동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 아니라, 느리게 움직이기에 더욱 잔혹한 공포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내친김에 그 무렵의 에피소드를 하나 더 꺼내 볼까. 내가 살던 집에 그가 놀러왔을 때였는데, 갑자기 커다란 바퀴벌레 한 마리가 벽을 타고 등장했다. 나는 곤충을 딱히 무서워하지도 않을 뿐더러 바퀴벌레 정도야 얼마든지 스스로 잡아서 처리할 수 있었지만, 남자친구 앞이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 당연히 그가 잡아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역시 가만히 있는 게 아닌가. 그대로 있다가는 바퀴벌레가 집 안 어딘가로 숨어들어 무한 증식할 것 같았기 때문에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내 손으로 녀석을 잡아 처리하는 동안 계속 망설이고 주저하는 그를 보며 나는 알아챘다. 바퀴벌레를 두려워하는구나.

물론 나도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 수심을 알 수 없을 정도의 깊은 물을 보고 있으면 정신이 아득해지고 숨이 막히고 무섭다. 우주를 찍은 사진을 봐도 그렇고, 목성이나 토성 같은 거대한 행성의 사진을 봐도 마찬가지다. 타인이 느끼는 공포감을 똑같이 느낄 수는 없다 해도, 어떤 대상에 대해 내가 느끼는 공포감을 떠올려 본다면 관람차나 바퀴벌레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어쨌거나 인간은 공포를 느끼면 신체적인 반응까지 함께 얻게 된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나고 그 땀이 증발하면서 체온이 살짝 내려간다. 올여름에는 모처럼 온몸이 서늘해질 만한 문학 작품들을 섭렵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 혹독한 더위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도록 말이다.

아, 어쩌면 굳이 픽션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현실 자체로도 충분히 무섭고 두려울 때가 있으니까. 변이 바이러스가 또 나타나고 코로나 확산세가 심상치 않은 지금, 정부는 과학방역이라며 우리에게 각자도생을 요구한다. 치솟은 물가에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힘겹기만 한데, 정부가 발표한 세제개편안은 대기업의 법인세 인하와 부자들의 세금 감면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픽션과 현실, 올여름의 공포물로 어느 것이 더 무서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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