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의 지발도네(Zibaldone)] 기후변화라는 인류의 시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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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1808년 프랑스의 사상가 샤를 푸리에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후가 이탈리아 피렌체나 프랑스의 니스처럼 바뀔 것이라고 썼다. 그의 책 〈4 운동론〉은 ‘기후변화’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만들어 낸 저작물이기도 하다. 팔랑쥬라는 ‘공산촌’을 설립해서 자신의 이념을 실천하기도 했던 이 ‘유토피아적 공산주의자’가 뜻밖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기후변화를 이미 19세기에 예견했던 것이다. 단순하게 용어를 착안한 것에 그치지 않고 푸리에는 정확하게 그 원인을 증기기관의 발명에서 시작한 온실가스의 배출에서 찾고 있다. 자연이 아니라 인류가 환경 변화의 조건이 되는 ‘인류세(人類世)’에 대한 인식이 푸리에에게 있었던 것이다.


기후변화 200년 앞서 내다본 푸리에

환경에 대한 인류의 악영향 예견 놀라워

지구라는 행성의 물질성에 대한 인식

근대적 사고의 틀 넘어 새롭게 수용해야


물론 이런 기후변화에 대한 푸리에의 생각은 당대에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독일의 독자에게 푸리에를 소개하는 글에서 엥겔스는 푸리에의 자연주의를 농담거리로 삼았다. 푸리에는 북극의 빙산이 녹고 바닷물의 산성화가 진행되어 레모네이드 같이 변할 것이라고 했는데, 엥겔스는 이를 어처구니없는 공상이라면서 기후변화에 대한 푸리에의 주장보다는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그의 비판만을 부각시켰다. 푸리에의 사상에 대한 엥겔스의 일반적 평가는 “공상적 사회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로 대체하는 과정이었다고 정리하고 있지만, 현실 경제체제로서 사회주의 블록이 붕괴하고 글로벌 자본주의 역시 팬데믹과 기후변화의 위기 앞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리고 있는 지금, 다시 발견하는 푸리에의 주장은 손쉽게 비과학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적확하게 우리의 문제를 짚어 내고 있어서 놀라울 지경이다.

이 시점에서 19세기 이래 인류의 발전을 주도해 온 진보주의를 반성하기 위한 하나의 외부로서 푸리에의 유토피아주의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기후변화를 비롯한 자연의 귀환은 인류세라는 인간 자신의 자멸적 조건과 맞물려 자본주의 자체를 반성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전례 없는 폭염과 가뭄, 그리고 폭우를 겪으면서 우리는 여전히 그때그때 발생하는 자연재해의 상황에 대처하기 급급할 뿐, 가까운 미래에 닥쳐올 것이 자명한 파국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은 누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런 종말의 상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 ‘돈룩업’은 지구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거대한 운석을 발견한 과학자들이 그 사실을 알렸음에도 아무런 대책을 세울 수 없는 인류의 운명을 코믹하게 보여 준다.

‘돈룩업’은 비슷한 소재를 다룬 영화 ‘멜랑콜리아’의 코미디 버전이라고 할 만하지만, 후자가 전 인류의 종말이라는 묵시록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면, 전자는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의 부를 이용해서 다른 행성으로 탈출하는 장면을 그려 냄으로써 계급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두 영화 모두 희망 없는 인류의 자멸이라는 기본 메시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이런 영화들이 분명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문제를 적절하게 다루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두 영화를 관통하는 비관주의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거대 서사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냈다고 보지는 않는다. 브뤼노 라투르 같은 과학철학자가 ‘가이아 전쟁’이라는 용어를 동원하면서 근대인의 만행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적수로 삼고 있는 근대인의 반대편에 있어야 할 그 비근대인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근대인과 비근대인이라는 이분법 자체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아이러니는 차치하더라도, 그 비근대인이 글로벌 자본주의와 무관한 꿈을 꾸기 위해 필요한 것은 푸리에의 유토피아 공산주의 같은, 이 글로벌 경제체제의 합리성에서 배제된 이념이다. 라투르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세계가 아니라 그 세계를 발명할 ‘주체’이다. 무엇보다도 근대인들이기도 한 이 주체는 이미 민족-국가의 숭고 대상에 사로잡혀서 인류가 살고 있는 행성의 물질성을 외면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으로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는 이 욕망의 배치를 재구성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닥쳐오고 있는 가까운 미래의 재난 상황은 지금까지 인류가 가꾸어 온 기본적인 권리와 가치를 ‘국가적 대책’이라는 명분으로 폐기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이 상황을 ‘멍청한 인류의 자살 행위’라고 비관하는 것은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산물일 뿐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인류의 멸종이 아니라, 공평하지 않을 재난의 충격이다. 근대 이후 합의해 온 인류애라는 보편 가치를 어떻게 지킬 것인지 우리 모두가 시험받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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