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칼럼] 요즘 가족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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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논설위원

‘민족 최대의 명절’ 발전시켜
모두가 행복한 축제 되도록

가족, 정서적 안정 가장 중요
적극적 선택 더욱 증가할듯

‘비친족가구’ 급증세 맞춰
가족 같은 관계에 지원 늘려야

‘어느 용병의 30년 명절 전투 종전기.’ 추석을 앞두고 지인이 페이스북에 예사롭지 않은 제목의 글을 올렸다. “차례 전투가 끝나면 전우였던 동서와 함께 다음 전투를 기약하며 각자의 조국(친정)으로 길을 떠난다. 그럴 때면 며느리는 용병 같다는 생각을 한다.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충성하면서 조국 전투엔 참전을 못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매년 이 전투를 무사히 치르자 다짐했는데 올해는 남편이 전투 형식에 모순을 느끼더니 더 이상 대규모 전투는 없다면서 종전을 선언했다. 연휴에 펜션을 예약했다니 30년 넘게 차례를 지내 온 입장에선 아쉬운 마음도 든다.” 며느리들의 명절 스트레스는 마음에서 온 병이었다.

성균관이 올 추석을 앞두고 차례상 간소화 방안을 내놓은 걸 보면 그래도 세상은 변하고 있는 모양이다.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낡은 수식어를 점차 덜 쓰는 점도 다행스럽다. 이주민 인권운동을 하는 분으로부터 “민족은 결국 인종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뒤 이 표현은 듣기에 불편해졌다. 명절 연휴에 거리에서 만나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갈 데가 없는 이방인처럼 보인다. 우리 명절도 크리스마스처럼 모두가 행복한 축제가 될 수는 없을까.


추석을 앞두고 발생한 몇 가지 일들이 가족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해 주었다. “엄마, 사랑해요.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포항 아파트 주차장 침수 사고로 숨진 중학생 아들이 어머니에게 고한 작별 인사는 너무 가슴이 아팠다. 살아남은 우리가 할 일은 돈을 더 벌 궁리가 아니라, 좀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산가족 문제도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권영세 통일부 장관이 남북 간 생사 확인, 서신 교환 및 수시 상봉 등을 내용으로 하는 남북 이산가족 회담을 북한당국에 제안해서다.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일들이 아닌가. 이산가족 생존자 중 80세 이상 고령자가 66.4%라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머지않아 이산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소멸할지도 모른다. 추석 연휴 이산가족들의 마음은 얼마나 심란했을까.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의 마지막 소원 좀 들어주면 안 되나.

추석 직전 한 통신사가 내놓은 상품에서 변화를 실감했다. SK텔레콤의 신규 유무선 결합상품 ‘요즘가족결합’은 거주지가 같으면 할인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동안 법적 가족만 결합 할인을 제공했는데 혈연이 아니더라도 할인이 적용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비친족가구’는 법적 가족, 혈연이 아닌 일반 가구 가운데 친족이 아닌 남남으로 구성된 5인 이하 가구를 의미한다. 지난해 부산의 비친족 가구원 수는 5만 4796명으로 사상 처음 5만 명을 넘어섰다. 2016년 3만 1067명과 비교하면 5년 만에 76.4%나 급증했다. 비친족 가구가 크게 늘어도 가족처럼 서로 돌보는 친밀한 관계의 사람들에 대한 지원 제도가 전무해서 문제였다. 이들은 주거 대출·주택 청약 등 법률혼 부부를 대상으로 하는 주거 지원을 받지 못한다. 부부에게 제공하는 자동차 보험 할인이나 통신사 가족 할인 혜택도 받을 수 없었다. 장벽이 하나 무너진 것이다.

법률상 가족관계로 인정받지 못하면 동거인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 병원에서 요구하는 ‘보호자 동의’가 대표적이다. 비혼 동거 가족은 서로가 보호자지만 법적 혼인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보호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하지만 각국에서 가족의 범위는 확장하고 있다. 우리에겐 낯선 ‘선택된 가족(chosen family)’이라는 용어가 일상에서 사용된다. 혈연이나 법률혼으로 연결되지 않았으나 가족처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친밀한 사람들을 말한다. 미국에서 가족돌봄휴가의 대상 가족에는 ‘선택된 가족’ 개념이 적용되는 추세다. 스웨덴에서 정부로부터 돌봄 수당을 지급받을 수 있는 ‘친밀한 관계에 있는 자’에는 혈연이나 인척 관계가 없는 친구나 이웃도 포함된다. 캐나다는 근로자가 임종을 앞둔 누군가를 돌보기 위해 근로를 하지 못할 경우 임금의 55%를 보전해 준다. 유일한 조건은 가족으로 여기고 있는가이다.

가족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절반가량이 ‘가족 구성원들과의 소통과 교류를 통해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허민숙 여성학 박사는 “가족이라는 개념의 변화는 이러한 정서적 안정을 획득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적극적 가족 실천의 결과일 수 있다. 가족에게 기대했던 정서적 안정을 가족으로부터 찾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적극적인 가족 선택은 앞으로도 더욱 증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가족은 해체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화·발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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