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FF에서 만난 영화인] ‘라이스보이 슬립스’ 감독 “어렸을 때 본 영화에 저처럼 생긴 주인공은 없었죠”
앤서니 심 감독 자전적 이야기
최승윤·에단 황 연기력 돋보여
11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시네마운틴에서 만난 앤서니 심 감독과 배우 최승윤, 에단 황. 안지현 인턴기자
“지금까지 한인 이민자들에 대한 영화는 많지 않았습니다.”(앤서니 심 감독)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플래시포워드 부문 초청작 ‘라이스보이 슬립스(Riceboy Sleeps)’는 1990년대 한국에서 캐나다로 이주한 홀어머니 소영(최승윤 분)과 아들 동현(에단 황)에 관한 이야기다. 앞서 올해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선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플랫폼상을 받았다.
11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시네마운틴에서 만난 앤서니 심 감독과 배우 최승윤, 에단 황은 캐나다와는 달리 무심한 듯한 BIFF 관객들의 모습에 긴장했지만, 쏟아지는 호평을 듣고 안심했다고 입을 모았다. 최승윤은 “BIFF에서 첫 상영 때 너무 조용하더라. 캐나다 관객들이 웃었던 부분에서 한국 관객들은 웃지 않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도 박수가 없었는데, 관객들이 나가지는 않더라”면서 “나중에 표현해주시는 것들을 듣고 많이 안심했다. 오히려 한국 관객들이 저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앤서니 심 감독은 “한국에서도 평가가 좋을지 걱정을 많이 했다. 잘못되면 한국에 다시 못 올까 봐 걱정했다”며 “다행히 많은 분들이 감동을 받았고, 제가 전하려 했던 메시지도 잘 이해하는 것 같아서 기쁘다”고 밝혔다. 에단 황은 팬에게 꽃을 선물 받기도 했다며 웃어 보였다.
11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시네마운틴에서 만난 앤서니 심 감독과 배우 최승윤. 안지현 인턴기자
“시나리오 쓰는데 나온 ‘미나리’…비슷한 내용일까 패닉”
서울 출생인 심 감독은 8살이던 1990년대 초 부모와 함께 캐나다 밴쿠버로 이주해 그곳에서 생활해왔다. 고교 시절 아버지를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당시 몸담았던 연극반 활동을 계기로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수십 편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활약하면서도 “서른이 되기 전 장편영화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던 그는 영화 ‘도터’(2019)를 통해 그 꿈을 이뤘다. 자신감을 얻은 심 감독이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 연출한 두 번째 작품이 바로 ‘라이스보이 슬립스’다.
영화는 한국인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미나리’(2019)와 비교되곤 하지만, 실제 내용이나 구성은 사뭇 다르다. 오히려 ‘박하사탕’ 등 다른 한국 영화나 유럽 영화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심 감독의 설명이다. 그는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하던 중 ‘미나리’가 선댄스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는데, 너무 비슷한 내용일까봐 잠시 패닉이 왔다”면서도 “직접 영화를 보니 겹치는 게 많지 않아 안심했다”고 밝혔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특히 배우 섭외 과정에서 난항을 겪었다고 한다. 심 감독은 먼저 소영 역에 대해 “북미에서 캐스팅을 시작해 거의 모든 한인 배우들과 오디션을 봤지만 제 생각에 딱 맞는 사람은 없었다. 한국말은 완벽하지만 영어는 적당히 하면서 감정 표현도 가능해야 했는데, 그것부터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우연히 한국의 캐스팅 감독을 알게 됐는데, 그분이 ‘특별한 게 있는 사람’이라며 제안한 후보가 최승윤이었다”고 설명했다.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에서 소영을 연기한 배우 최승윤. 안지현 인턴기자
안무가 출신인 최승윤은 2018년 돌연 웹 드라마 ‘dxyz’로 데뷔해 주목 받았고, 이듬해에는 공동 연출작 ‘아이 바이 유 바이 에브리바디’가 BIFF에 초청 받는 등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심 감독은 “알맞은 배우를 찾지 못해 작품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질 정도였는데, 최승윤의 오디션을 딱 보고선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로 몇 번 더 오디션을 봤을 때도 매번 ‘이 사람은 이 역할과 운명이다’라고 느꼈다”고 캐스팅 배경을 설명했다.
5살부터 발레를 시작한 최승윤은 배우가 된 계기에 대해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제안 받은 일을 했던 것이 시작”이라며 “아직 무용가로도 일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어 “따로 연기 수업을 받은 적은 없다”면서 “이번 영화에선 심 감독과 함께 트레이닝하고 2~3주간 리허설을 했다. 전문 교육을 받지 않아 테크닉은 없지만, 캐릭터를 자신과 연결하는 면에서 강점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제가 가진 능력들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항상 도전하면서 살고 싶다. 연기, 무용, 연출 모두 결과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명확히 알고 일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심 감독은 한국계 캐나다인 에단 황을 섭외한 과정에 대해선 “북미에 어린 한국 배우들이 많지 않아 배역에 맞는 사람을 찾기 정말 힘들었다”며 “찾고 찾다가 토론토에 있는 한국 배우에게 에단을 추천 받게 됐는데, 사진을 보자마자 ‘얘가 동현이다’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에단 황은 “대본을 읽었을 때 타국에서 사는 한국인 캐릭터에 굉장히 공감할 수 있었다”며 “아버지가 캐나다로 이민을 오셨는데, 대본을 보고 정말 공감하셨다”고 전했다.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에서 동현을 연기한 배우 에단 황. 안지현 인턴기자
“부모 세대 한인 이민자들, 영화 감독 꿈도 못 꿨을 것”
2004년 생인 에단은 넷플릭스 ‘엄브렐라 아카데미’에서 조연으로 출연해 주목 받기 시작했으며, 주연을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에단은 “주연을 해본 적이 없어 부담이 됐다. 대본이 굉장히 좋았지만, ‘영화가 성공하지 못하면 내 탓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했는데 결국 극복해냈다”며 “감독님에게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책과 영화를 많이 추천 받았고, 트레이닝도 받았다. 심 감독은 내게 좋은 멘토였다”고 감사를 표했다.
심 감독은 “한인 이민자들에 대한 영화는 그동안 많지 않았다. 나와 비슷하게 자라온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보며 자신을 투영할 것”이라며 “에단에게 그런 책임감과 중요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영화가 잘 되든 그렇지 않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다행히 너무 훌륭하게 잘해줬다”고 말했다.
영화 속에서 심 감독은 소영의 직장 동료인 사이먼을 연기하기도 했다. 심 감독은 이에 대해 “원래 제 작품에서 제가 연기하는 걸 싫어한다. 시나리오 단계에선 사이먼이 인도 남성이라는 설정이었다”며 “대사까지 다 썼지만, 이야기에 잘 맞지 않는 것 같아 결국 한국 입양아 캐릭터로 바꿨다. 캐스팅 감독들도 제가 사이먼 역에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하고, 스스로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연기를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심 감독은 또 “제가 자라면서 영화를 많이 보고 좋아했는데, 저처럼 생긴 주인공들은 별로 없었다. 있어도 쿵푸 영화였다”며 “이전 세대 한인 이민자들은 먹고 사느라 영화 감독을 한다는 생각은 절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부모 세대 덕분에 우리 세대에서 처음으로 이런 꿈도 가지고 기회를 찾을 수 있게 됐다. 이제부터 더 많아져야 하고, 더 많아질 것 같다.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한국 관객들을 향해선 “한국에서 ‘라이스보이 슬립스’가 개봉할 예정이다. 극장에 찾아와서 많이 관람해달라”고 당부했다.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를 연출한 앤서니 심 감독. 안지현 인턴기자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