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태의 요가로 세상 보기] 82. 성(性, sex) 에너지를 성(聖, saint) 에너지로 바꾸어 보는, 브라마차리아 아사나
브라마차리아 아사나를 실행할 때는 상체를 바르게 세우고 다리를 곧게 펴고 앉아 엉덩이 옆 바닥에 양손을 붙인다. 팔꿈치가 구부러지지 않게 펴고 양다리를 위로 들어 올린다. 팔 근육, 복부 근육, 하단전을 강화해 주며 괄약근의 수축력을 높여 요실금에 도움이 된다. 욕망을 다스려 의지력을 높이는 데도 유용하다. 시연 최진태.
예술이냐 외설이냐를 놓고 법정에 섰던 장편 소설 ‘북회귀선’의 미국 작가 헨리 밀러는 “섹스는 환생해야 할 아홉 가지 이유 중 하나이다. 나머지 여덟 가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렇듯이 성(性)을 성(聖)스럽게 느끼는 마음과 추하게 느끼는 마음이 순간순간 교차한다. 우주는 음과 양의 거대한 성력(性力)으로 구성되어 있다. 음양의 우주 생성 에너지가 사람의 생명체에도 들어와 있으며, 회음부에 잠재하고 있다. 이 종자(種子)가 일부 현상적으로 발현되고 있음이 곧 생명력(vitality)이다.
성력(性力)이 넘쳐흐를 때는 주위를 매혹시키는 체향이 풍부하게 일어나서 매력이 넘치는 자태가 되며, 보다 고차원적인 정신에너지로 승화되어 생명력의 발현이 높아진다. 왕성한 성 에너지와 호흡 능력, 올바른 자세의 체력과 바른 이해력이 삶의 기쁨을 맛보는 자기실현의 추진력이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러므로 특히 정력을 낭비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고대로부터 구도자나 종교수행자들에게 소중한 문제였으므로 금욕주의가 등장했다.
요가에서 우주의 생식력 또는 생성력이라고 하는 삭티(sakti)는 우주의 원천적 힘을 뜻하는 인간의 근본 에너지인 성(性) 에너지를 뜻한다. 성(性)은 성(聖)스러운 우주의 신성(神性)이고, 개체의 모든 능력의 기본 에너지는 역시 성력(性力)이다. 그러니까 성력(性力)의 성숙과 그 활용이 끝나면 삶의 흐름도 멈추게 된다고 본다.
이 삭티를 일깨워 활성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성(性)과 속(俗)은 단일한 에너지의 양극이 된다. 이 성(性) 에너지를 어떤 방향으로 쓸 것인가가 문제다. 성(性)을 통해서 아래로 사용하면 생명이 잉태되는 것이고, 위로 끌어올리면 특히 상단전 쪽으로 올리게 되면 깨달은 성자(聖者) 무니(muni)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성(性)과 성(聖)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사용하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뱀과 용으로 갈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요가 수련의 8단계에서 첫 번째 단계가 금계(禁戒, yama)이다. 살생하지 말 것, 도둑질하지 말 것, 탐욕하지 말 것, 그리고 브라마차리야 즉 금욕(禁慾)을 강조하고 있다. 금욕은 비윤리적인 남녀관계의 금지뿐 아니라 본능적인 자기 욕구의 절제·억제를 말한다.
요가에서는 생명 에너지인 성(性) 에너지를 정신적이며 영적인 성(聖)스러운 에너지로 승화시켜가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정(精)이 소모될 때 소중한 에너지가 흩어져 버리고, 정신력을 쇠약하게 하여 의식의 집중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집착과 욕망, 열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도 더욱 그러하다.
고전 요가 경전에서는 “정력의 남용은 죽음을 부르고 정(精)을 몸속에 보존하면 몸속에서 향기가 나고 모든 지력(智力)이 빛난다”고 언급하고 있다.
요가수행자의 절제하는 삶은 본능까지도 다스릴 수 있어야 하며 그리하여 누적된 힘을 구도와 지성의 계발에 쓰고 잘못된 것과 싸우는 용기와 지구력으로 활용하라고 강조한다. 성(性) 에너지를 조절하여 창조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다.
‘브라마차리아’란 말을 번역하면 ‘신의 길을 걸어간다’는 뜻이다. 생각·말·행위의 순화와 같은 뜻도 포함된다. 이는 감각적 쾌락을 자제함으로써 감각기관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깊은 생명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리라.
브라마차리아는 지혜의 횃불을 당기는 불씨와 같다.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감각적 쾌락의 허망한 베일을 꿰뚫어 보고 밖으로 향하는 감각들이 내부로 향하게 하는 법을 배운다. 그는 에너지를 신성한(혼의) 사원으로 되돌린다.”(B.K.S.아헹가)
가족이 있든 독신이든 일상생활에서 자제와 극기가 필요한데, 이것은 집착과 욕망, 열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도 그렇다.
바가바드 기타(6-14)에서는 “침착하고 용감하고 분명하게 브라마차리아를 맹세하고 마음을 다스린 후 ‘나’를 생각하며 균형을 취하고 그를 앉혀 나를 그의 최고 목표가 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인도의 카주라호에 가면 간디가 ‘다 부숴버리고 싶다’고도 하였던 남녀 간의 성적 결합을 표현한 수많은 조각상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인도는 성(性)이 넘치는 에로스 천국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명상과 금욕이라는 또 다른 얼굴을 갖고 있다. 인도 신화에서도 금욕적인 신과 에로틱한 신이라는 모순적인 이미지가 동시에 등장하는 것도 흥미롭다.
1938년 영국군 장교의 발견으로 정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카주라호 사원은 유엔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11세기의 건축물이다. 사암(沙岩)으로 건축한 22개의 사원이 모여 있는 카주라호는 논란의 와중에도 예술적이면서도 외설스러운 조각상들 덕분에 오늘도 수많은 관광객의 발길이 향하고 있다. 이는 AD 400년경 인도의 굽타 왕조 시대의 것으로,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초·중기에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탄트라 전통에서 남녀의 성교는 단순한 육체적인 결합 이상으로서 우주의 합일을 의미한다.
“쾌락과 종족 번식 행위가 수행의 방편이 될 수 없다는 편견이 남아 있다면, 그 편견을 버려야 조금은 이해를 할 수 있으리라. 기쁨의 세계가 누구나 원하는 어떤 차원이라 한다면 탄트라는 살아 있는 지금을 기쁨으로 삼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손잡이가 없는 칼날처럼 위험한 점까지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육체적인 탐닉에 그쳐 본질을 놓친 본능적인 몸짓이 아니라, 사랑하는 그 마음과 느낌마저 넘어서 하나가 되는, 그리하여 분리된 두 개의 육체와 영혼이 에너지의 교감을 이루어 더 높은 차원으로 상승시키려는 통로이자 시도가 성스러운 희열이 되게 한다는 것, 그것이 탄트리즘이며 실천을 위한 각자의 실천 수행이 탄트라인 것이다.”(배해수)
카마는 인도의 에로스이고 그리스 로마 신화의 큐피드로서 사랑의 신으로 통한다. 카마는 욕망과 애정, 애욕을 주재한다. 리그베다에서 카마는 생명을 지닌 유일자를 처음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고 말한다. 그 카마가 한 권의 경전으로 묶어진 것이 카마수트라이다. 카마수트라는 성(性)에 관한 지침서이자 안내서이다. 지금도 인도에서는 결혼하는 딸에게 넣어주는 혼수품 1호이다.
“모두들 내숭을 떨지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명제는 역시 섹스(sex)이다. 일찍이 몽테뉴는 포르노 잡지의 유행을 예견했고, 루터는 허랑방탕한 여학생의 생활을 탄식하면서도 자유연애를 지지했다. 플라톤은 화를 내겠지만, 사랑이 없는 섹스는 있어도 섹스가 없는 사랑은 없다지 않는가.”(이옥순)
카마수트라는 고대인도의 성애론서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중요한 문헌이다. 바츠야나 작(作)으로 약 4~5세기경 성립하였다고 추정된다.
첫 장을 열면 ‘내일 공작새를 얻는 것보다 오늘 비둘기를 갖는 것이 낫다’거나, ‘불확실한 내일의 금으로 만든 잔보다 오늘의 놋쇠 잔이 더 낫다’는 그럴듯한 말들이 보인다. 알 수 없는 내세보다는 이승의 쾌락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어서 다양한 섹스의 기교와 교접, 결혼 등의 내용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고대 인도에서는 인생 4대 목적을 다르마(법), 아르타(재물), 카마(성애) 모크샤(해탈)라 했다. 바츠야나는 특히 카마를 배우는 의의를 강조해서 이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본서 마지막에서 “이 책은 최고의 금욕과 정신통일에 의해서 세인의 생활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만든 것으로, 정욕을 목적으로 편찬된 것이 아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카마수트라는 겉으로는 성(性)에 대한 교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시대를 살았던 영적인 세계에만 사로잡힌 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도 담겨 있다. 승(僧)과 속(俗)의 경계를 나누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이중적인 잣대이고 눈속임인지를 말이다.
외국인들도 인도에서 외설스럽다고 고개를 흔드는 또 다른 대상 중의 하나는 남근(男根) 숭배이다. 인도에서 크리슈나에 이어 널리 숭배되는 신이 바로 파괴와 재생의 신 시바인데 코브라를 화환처럼 목에 두르고 명상하는 자세의 금욕주의자 시바는 하늘을 향한 남성의 성기 형태, 즉 링감으로 숭배된다. 링감은 시바의 지칠 줄 모르는 성적 능력을 상징한다고 한다.
“고대의 경전 우파니샤드를 보면, 암수한몸인 인간이 왠지 외로워서 자기 몸을 분열한 결과 여자가 생겼다. 성경도 같은 얘기를 전한다. 하느님은 여섯째 날에 암수한몸인 인간을 창조했고 고독한 아담을 위해 그의 기관 하나를 뽑아 여성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섹스가 이 세상의 ‘빅뱅’이었다. 그러나 이후 문명은 에로스를 억압하면서 이루어졌다. 그 일이 아닌 창조적인 영역에 에너지를 써야 한다는 고상한 명제가 인류를 짓눌렀다. 성을 둘러싼 인도인의 갈등도 이러한 전통의 소신인 것이다.”(이옥순)
남자와 여자는 자체 속에 남성과 여성을 함께 갖고 있는 음과 양의 상응체(相應體)이다. 남자는 남성이 조금 더 진할 뿐이고, 여자는 여성이 조금 더 진할 뿐이다. 남자는 자기 속에 잠재된 여성적 성향과 비교적 일치하는 느낌의 바깥 여성을 사랑하게 되고 여성도 보통 그러하다고 식자들은 말한다.
“사랑하는 남녀 간에 있어서도 만남에 치우치면 피로와 고통과 마비의 둔감이 오고, 벌어짐이 치우쳐도 헤어짐과 같이 서로 의사소통이 없는 마비의 둔감이 온다. 생명의 삶은 이 두 가지의 양극적 치우침이 아니고 리드미컬한 반복의 조화이며, 중용이고 중도의 묘인 것이다. 다소 멀어진다는 의식과 행동의 실천이 서로 가까워짐을 새로이 하는 그리움을 만드는 것이다. 자연의 생명법칙은 서로 다른 성질의 균형적 화합이므로, 가까워짐과 멀어짐의 리듬을 깨뜨리면 필링이 약화된다. 따라서 사랑을 상대가 연출해도 자기화에 의해 상대의 손이 자기 손이 되어 자기가 자기 몸 만지듯이 둔감한 결과가 오는 것이다.”(김광백)
밀도 높은 서로의 만남은 사랑이다. 그 반대가 미움이다. 함께함으로 지치면 홀로임이 지혜로운 처방이며, 홀로임으로 지치면 함께함이 지혜이고 처방이다. 삶은 함께함과 홀로임의 균형적 화합의 리듬이라고 할 수 있다.
농촌에서 송아지의 배태를 위해 암소와 수소를 교미시키는 경우가 있다. 이때 한 번 교미 후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재교미를 시도하면 잘 안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는 서로 마주 보지 않는 자세로 각기 반대 방향으로 걷게 한 후, 다시 돌려서 교미를 재시도하면 쉽게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생명체와 우주가 지니고 있는 반작용적 행동과 의식에 대한 전환적 에너지 회복이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우주의 법칙이며, 재생의 법칙인 것이다. 소들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서 걷게 한 것이 성 에너지 회복을 촉진시킨 결과이다.
요가에서는 사랑의 행동 자세 쏠림 수정의 처방법이 있다. 남성은 전후 작용의 폭이 크므로, 군에서 반동 주며 군가 부르듯이 골반을 좌우로 흔들어 준다든지, 두 다리를 모아서 성력(性力)을 가동하고자 하였으므로, 두 다리를 최대한 옆으로 벌려 골반을 열어주는 동작을 해야 한다. 여성은 두 무릎을 구부려 열린 상태로 작용하므로 허리 비틀기, 소머리자세 등의 골반 좁히기를 권한다. 남녀 공히 두 팔 뒤로 보내기 운동과 복식호흡 등을 통해 성 센터의 혈액순환을 돕고 항문을 수축시켜 성력을 각성시키며 숨 멈추기를 훈련하여 지구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요가의 한 유파인 쿤달리니 요가의 환정술(還精術)에서는 소변을 끊어보는 바즈롤리 무드라와 요료법이라고 하는 아마롤리 무드라가 권장되고 있다.
탄트리즘의 요가 수행법은 육체를 중시하고 예찬하는 하타요가로 발전하게 된다. 하타요가는 ‘몸을 통하지 않고는 신성(神性)의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유파이다. 육체의 단련과 섭생에 전력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신의 정화된 육체로부터 직접 느끼고 경험하는 신성과 불멸성, 완벽성과 무한성보다 더 확실한 초월 체험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고 하타요가 고수들은 강조하고 있다.
자연은 부분을 합할 때 합 이상의 것으로 기쁨과 환희를 느끼게 하는 원리를 가지고 서로 어울리게 하고 있으며, 또다시 그것이 가능할 수 있게 되려면 남남으로 돌아가는 홀로임을 통해서만 이룩되도록 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고 생명의 사랑 법칙이다.
우리 선조들은 특히 뼈대 있는 사대부 집안에서는 부부간에 각자 다른 처소를 쓰면서 조금씩 더 가까워지려는 몸짓과 마음에 의해 좀 더 크고 깊은 사랑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엮어 갔다. 함께임에 치우친 편중된 사랑의 감정을 처방하는 지혜였다. 이것은 요가의 상응(相應) 원리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것이다.
레바논 시인 칼릴 지브란은 ‘사랑과 결혼의 시’에서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서로 사랑하라/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중략)/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에선 자랄 수 없다” 하였다.
브라마차리아 아사나를 실행할 때는 상체를 바르게 세우고 다리를 곧게 펴고 앉아, 엉덩이 옆 바닥에 양손을 붙인다. 팔꿈치가 구부러지지 않게 펴고 손바닥에 의식을 집중하여 양다리를 위로 들어 올린다. 다리를 가능한 한 수평으로 뻗은 상태에서 몸의 균형을 유지한다.
팔의 근육, 복부 근육, 하단전을 강화해 주며 괄약근의 수축력을 높여줌으로써 요실금 등에 도움이 된다. 성적(性的)인 기운을 영적인 강화의 에너지로 승화시킬 수 있게 한다. 이 자세의 명칭처럼 욕망을 다스려 수행자의 의지력을 높이는 데도 유용한 아사나이다.
이 브라마차리아 아사나 외에도 성적 욕구를 다스리기 위한 아사나로는 파스치모타나 아사나, 파리브리타 파스치모타나 아사나, 물라반다 아사나, 칸다 아사나, 숩타 트리비크라마 아사나, 에카 파다 라자 카포타 아사나, 라자 카포타 아사나 등이 있다.
“진실로 성숙한 남자는 자신의 성적 욕구를 자기 마음대로 다룰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욕망이라는 종마(種馬)를 우리에 가둬 놓은 사람이다. 종마를 우리에 가둘 수 있을 때야 비로소 그 욕망을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 갈 수 있다.” 뉴질랜드 심리학자 스티브 비덜프의 말이다.
화가 날 때마다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처럼, 성적 욕구가 충동질할 때마다 그것을 행동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참으로 쉬운 듯하면서 또한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그것이 곧 브라마차리아인 것을.
논어 ‘안연편(顔淵編)’에 극기복례(克己復禮)란 말이 나온다. 충동적이고 감성적인 자아를 의지로 극복하며 예법을 갖춘 교육적 인간상인 군자(君子)의 이상으로 돌아감을 일컫는다.
이황은 극기복례의 길은 천리(天理)를 따르고 인욕(人欲)을 멀리하는 데에 있다고 봤다. 이를 위하여 주자학에서 중시하는 수양의 두 가지 방법으로 거경궁리(居敬窮理) 즉 거경은 내적 수양법으로 항상 몸과 마음을 삼가서 바르게 가지는 일이고, 궁리는 외적 수양법으로 널리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정확한 지식을 얻는 일인 이 방법을 취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같은 극기복례의 태도는 바로 구도적 정신과 결부된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극기(克己)는 마음의 욕망과의 싸움보다는 극기주의(금욕주의), 극기 운동 등 육체적 훈련 과정을 지칭하는 경우에 더 많이 쓰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산티아고 노인이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라고 한 말은 인간의 의지를 잘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자기 절제 및 욕망의 극기 능력은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의 표현이란 것을 ‘브라마차리아 아사나(금욕자의 자세)’를 통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인도 카주라호 사원의 조각상.
[사랑이 넘치는 카주라호/ 최진태]
카주라호 사원에 가면/수많은 조각상들이 서로 뒤엉켜/원초적인 성(性)과 생명의 에너지를/밤낮없이 토해내고 있다/목하 열애 삼매경이다
행위 중에 명상에 잠기어 있는 듯한/꿈꾸는 표정들로 가득차 있다
인간은 벌거벗었을 때/가장 진솔한 모습을 만나게 된다는데/그 감각의 문을 두드리는/남과 여의 저 열정적인 몸짓들
그들은 과연/나와 우주가 하나되는/범아일여(梵我一如)를 꿈꾸던/천년 전/최초의 철학자들이었을까?/최고의 로맨티스트들이었을까?
아니면 그들은/육체가 곧 신이 거처하는/성전(聖殿)이라고 주장하고 있는걸까
카주라호 사원 앞에서/두 손 모은 수행자의 얼굴에/구슬 땀이 흥건한 건/신심(神心) 때문일까?/성심(性心) 때문일까?/참으로 불경스러운 마음 한번 내본다
부장가 아사나.
[브라마차리아 아사나/ 최진태]
우주는 음과 양의 거대한 성력(性力)결합/이들이 넘쳐날 때 생명력도 최대 발현/남용은 아니됩니다 금욕주의 등장 이유
성(性)이란 무엇일까 우주적 본능 행위/대상따라 성스럽다 대상따라 추하기도/그 욕구 인정은 하되 절제란 말 화두일세
범속함과 성스러움 그 경계 어디일까/가장 귀한 것들 일랑 가장 천한 흔함 속에/감춰져 있다 말한다 탄트라 경전들이
성에너지 잘만쓰면 성자(聖者)도 될 수 있고/성에너지 잘못쓰면 패가망신 화 부르네/뱀과 용 갈릴 수 있다 사용하는 사람따라
‘신의 길 걸어간다’ 뜻처럼 정갈하게/마음을 다스려라 자제력과 극기심도/밖으로 향하는 감각 말고삐를 조이며
양날의 칼날이군 약도 되고 독도 되니/버리면 이기리라 자유로움 위해서다/묘용의 도리는 없나 성찰하고 사유하고
앉은 채 두 발 뻗고 양손은 바닥 짚고/몸통을 들어 올려 쉬운 듯 난해하다/성에너지 통제한다는 선인들의 혜안을
팔근육 복부근육 하단전을 강화하고/괄약근 탄력성을 높여주는 효과있다/성에너지 영적 강화로 승화되게 돕는다니
최진태 부산요가지도자교육센터(부산요가명상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