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의 인사이트] 메가시티라는 허상과 거짓말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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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노무현 정부부터 20년간 이름 바뀌어
수도권 규제 완화 명분 쌓기로 전락
부울경 지자체장 특별연합 포기 선언
매번 정권 교체 때마다 데자뷰 현상
윤석열 정부, 지방 핵심 이슈 사라져
정치생명 걸고 지역 발전 정책 펼쳐야

2008년 5월 부산 해운대 그랜드호텔에서는 ‘광역경제권 시대의 지역 발전 전략’ 토론회가 열렸다. 부산과 울산, 경남발전연구원과 국토연구원 박사들은 물론이고, MB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기획·조정 분과 간사로 ‘5+2 광역경제권’ 정책에 관여했던 박형준 부산시장도 국회의원 신분으로 참여했다. 박 시장이 토론회에서 정부 내부 기류를 묻는 기자에게 “지역에서 강력하게 밀어붙여서 성취해야 한다”라고 말하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당시 토론회에서 “수도권 규제 완화는 현금이고, 광역경제권은 어음”이라면서 “광역경제권 구상이 수도권 규제 완화를 위한 명분 쌓기로 끝날 수도 있다”는 한 연구자의 주장이 눈길을 끌었다. “지역이 광역권 개발이라는 허상을 좇는 사이 경제 침체와 인구 이탈 현상이 가속화되고, 수도권만 더 큰 공룡으로 키울 우려가 높다”는 경고였다.


노무현 참여 정부 시대부터 시작한 ‘초광역경제권’ 논의는 이명박 정부에서 ‘5+2 광역경제권’으로 구체화됐고, 박근혜 정부의 ‘중추도시권’, 문재인 정부의 ‘특별연합’ 지방자치법 개정안, 윤석열 현 정부의 메가시티 지방시대 110대 국정 과제 포함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20년 역사를 돌이켜보면 “백 년을 기다려도 황하(黃河)의 흐린 물은 맑아지지 않는다”는 백년하청(百年河淸)만 연상된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일을 해결할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토론회에서 ‘설마~’라며 흘려들었던 그 경고는 섬뜩할 만큼 현실화했다. MB 정권이 끝나자마자 ‘5+2 광역경제권’ 정책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광역경제위원회와 광역교통본부는 동시에 간판을 내렸다. 광역 관광 마케팅은 논의조차 못했다. 광역권 토론회가 열렸던 해운대그랜드호텔이 허물어진 것처럼. 그런 10여 년 전의 일이 지난 12일 ‘부울경특별연합 파기 선언’과 함께 데자뷰처럼 일어나고 있다. ‘부울경 시도지사 회의’를 부산시청에서 가진 박형준 부산시장과 김두겸 울산시장, 박완수 경남도지사는 “부울경 특별연합(메가시티)은 실효성과 효율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출범하기는 어렵다”고 발표했다. 지방자치법 개정안과 예산까지 마련된 정책을 포기한 셈이다.

특별연합 정책을 지지한 86.4%의 부울경 주민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것처럼 낭패를 당했다. 초광역권은 물건너갔고, 수도권만 커질 거란 경고만 현실화했다. 그동안 지역에 일어난 변화는 쪼그라든 것 뿐이다. 부울경 인구가 빠르게 줄면서, 60.6%에 해당하는 읍면동이 소멸 위험에 처했다. 국내 경제 권역 중 지역 성장 잠재력은 최하위다. 지역 대학은 이젠 신입생 정원조차 채우지 못하는 지경이다. 두려운 사실은 10년 뒤에는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심화되면서 변화를 시도할 세력이나 경제 활력의 모멘텀조차 갖추기 힘들어진다는 점이다. 막차가 떠나고 있는 판세다.

다 차려진 밥상을 엎은 부울경 단체장 3명은 “특별연합 대신에 ‘부울경 경제동맹’과 ‘부산·경남 2026년 행정통합’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나가는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지난 20년간 필요성만 거론됐을 뿐, 논의조차 못한 행정통합을 꺼낸 것은 합의 결렬에 따른 정치적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지역 간에 갈등을 부채질하고, 도시의 에너지만 낭비하는 꼴이다.

지역이 초광역권 꿈을 좇던 20년간 변하지 않은 점은 단 한가지다. 역대 정권이 지역 발전을 말로만 외쳤다는 사실이다. 메가시티는 윤석열 정부가 110개 국정과제에 포함시키고, 지방자치 주무 부처인 행정안전부의 지방시대 중추 정책이다. 그 지방시대를 열어 갈 핵심 이슈가 물거품처럼 사라졌지만, 대통령은 여느 정권처럼 수수방관하고 있다. ‘수도권 집중 병폐를 해소하고, 또 하나의 국가 성장 엔진을 만들겠다’는 선거용 대의는 희미해졌다. 애초부터 그런 마음이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국민을 상대로 헛꿈만 꾸게 하는 역대 수도권 정권의 거짓말과 지방정부의 무능이 한심하다.

이제 와서 대통령과 중앙정부, 지자체장에게 메가시티 불씨를 살리라는 말을 하는 것도 소용이 없을 듯하다. 윤석열 정권의 지방시대 중심 정책이 사라진 이상, 부울경을 비롯한 전국 지자체는 당분간 각자도생을 모색할 것이다. 하지만, 소멸 중인 지역을 부활시키고, 국가 성장 엔진을 키워야 하는 모든 숙제는 윤석열 대통령과 부울경 단체장들이 져야 한다. 그 숙제를 하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86.4%의 부울경 주민이 그간의 경험으로 무능인지 속임수인지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대통령과 지자체장의 몫이다. 해답을 미리 알려 주자면, 우는 아이에게 엿이나 물려주는 ‘희망 고문’이 아니라, 운명을 걸고 지방시대를 펼치라는 민심이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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