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영어상용도시’ 논란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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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사례 없는 부산시 실험, ‘오륀지 꼴’ 안 나게 제대로…

미국도 안 하는 영어 공용어화
한국선 몇 차례나 시도해 실패
박형준 시장의 ‘영어 사랑’
공감 못 하는 시민 더 많아
부산시의회도 심사 보류로 제동
무리한 추진·면밀 검토 이유 들어
연구 용역·시민 여론 수렴 등 필요

지난 8월에 열린 부산시와 부산시교육청의 영어상용도시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식(위)과 6일 부산시청 앞에서 열린 부산영어상용정책 백지화를 위한 시민대회. 부산시·한글문화연대 제공 지난 8월에 열린 부산시와 부산시교육청의 영어상용도시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식(위)과 6일 부산시청 앞에서 열린 부산영어상용정책 백지화를 위한 시민대회. 부산시·한글문화연대 제공

박형준 부산시장의 대표 공약으로 부산시가 추진 중인 영어상용도시 정책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전국 100여 개 단체로 꾸려진 부산영어상용반대 국민연합은 강력한 반대 입장을 천명하고, 영어상용도시 백지화 시민대회를 잇따라 열고 있다. 부산시는 부산시교육청과 인프라 구축을 위한 협약을 맺고 밀어붙였지만 부산시의회에서 제동이 걸린 상태다. 국내 지자체에서 영어상용화 추진이 부산이 처음은 아니지만 성공사례는 아직 없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부산시가 영어상용도시를 추진할 때 고려해야 할 부분에 대해 체크해 보았다.


■ 영어, 대한민국 공용어로

상용화(常用化)란 무엇인가.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상용화(常用化)란 일상적으로 쓰게 하는 것이다. ‘영어 상용화’가 낯설다 보니 공용화(共用化)나 공용어(公用語) 정책과도 혼동하기 십상이다. 공용화는 함께 쓰게 하는 것이고, 공용어는 한 나라 안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언어를 의미한다. 재밌는 사실은 미국에서 영어는 공용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에서도 1907년부터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 연방정부는 지금까지 영어를 공용어로 법제화한 적이 없다. 미국이 다양한 언어를 배경으로 한 이민자들의 국가인 만큼,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했을 때 차별과 혐오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대한민국에서 영어 공용어화에 대한 논의는 몇 차례나 있었다. 보수 성향 소설가 복거일이 최초였다. 1998년 복거일은 “세계화를 위해서 민족의 언어를 버려야 한다. 한국어 대신 영어를 대한민국의 공용어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1년에는 민주당이 제주국제자유도시 계획을 발표하면서 영어를 제주도의 제2공용어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국립국어연구원과 한글학회 등이 반대하자 흐지부지됐다. 부산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만드는 계획이 발표된 일도 있었다. 2005년 교육인적자원부가 주최한 공청회에서 인천, 부산·경남 진해, 전남 광양 3개 경제 특구와 제주국제자유도시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방안이 나왔다. 갈수록 부산과 경쟁 관계로 부딪히는 인천의 유정복 시장이 현재 ‘영어생활도시’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는 점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 박형준 시장, 영어에 ‘진심’

“영어상용도시는 2030부산세계박람회를 계기로 토대가 만들어질 ‘글로벌 허브 도시 부산’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해외 사업가와 관광객이 활동하는 데 불편함이 없는 환경을 선제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영어상용도시 정책을 통해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사용하는 도시, 외국인과 외국 기업이 몰려드는 도시, 외국인이 사는 데 편리한 도시를 만들겠다.” 박형준 시장이 지난 8월 제2차 부산미래혁신회의에서 밝힌 내용이다.

박 시장은 영어에 진심인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2월에는 영어 ‘열공’에 빠진 박 시장이 부산 일부 지역에 대해 ‘영어 제2 공용어’ 지정을 구상하고 있다는 보도(부산일보 2021년 12월 15일 자)도 나왔다. 박 시장의 유별난 영어 사랑을 이명박 정부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경력과 연관시키는 해석도 있다. 당시 MB정부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미국에서는 ‘오륀지’라고 해야 알아듣는다”라며 영어몰입교육을 강조하다 후폭풍에 시달렸다.

부산시민들도 부산시의 영어상용도시 정책에 대해 반대가 많다. 한글문화연대가 시민 500명을 대상으로 시민인식 조사를 진행한 결과 40.9%가 반대, 27.6%가 찬성했다. 각계의 반대가 잇따르자 부산시는 추진 속도를 늦추는 분위기다. 한 언론사의 관련 보도에 대한 부산시의 해명자료에서 “공용화가 아니라 영어를 쓸 수 있는 환경을 넓히는 방향이다”라는 설명은 곤혹스러움이 묻어 있다. ‘공문서 영어 병기’도 시청 내 해외 관련 부서의 공문서 중 번역이 필요한 문서에 한정했다. ‘공공시설물 영문 표기’도 확대의 의미지, 영어로만 표지판을 만들겠다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 그 많던 영어마을, 지금은

서울시는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이던 2003년부터 ‘영어 상용화 사업’을 펼쳤다. 공문서를 영문으로 만들고, 직원들의 영어실력을 길러 간부회의를 영어로 진행하겠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같은 실패를 교훈 삼아 MB정부 때 영어몰입교육은 벌이지 말았어야 했다. 지난 8월 부산시가 부산시교육청과 맺은 협약서에는 권역별 영어교육센터와 거점학습 공간, 부산형 영어교육프로그램 개발, 영어방송 전문화 등을 추진한다는 계획이 나온다.

골자는 영어마을 사업의 확대다. 영어마을은 2004년 경기도 안산에서 시작해 전국 지자체에 유행처럼 퍼졌다. 하지만 상당수 영어마을이 애물단지로 전락하면서 세금만 낭비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안산, 하남, 대전의 영어마을은 평생교육원으로 바뀌었다. 파주영어마을은 한류트레이닝센터, 양평영어마을은 소프트웨어교육을 하는 체인지업캠퍼스로 활용되고 있다. 부산시가 지원하고 시교육청이 운영하는 영어마을인 글로벌빌리지를 다른 곳에 추가 설치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산시민의 58.9%가 반대하고 있다. 부산글로벌빌리지가 학생과 시민의 실질적인 영어교육 활성화에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 한글 간판 vs 영어 간판

부산은 영어상용도시가 아니어도 이미 영어를 너무 사랑하는 도시다. 센텀시티, 마린시티, 에코델타시티, 그린시티 등 지역 이름마다 영어 이름을 붙이고 있다. 꼭 영어를 써야 글로벌이 되는 것일까(영어 잘하는 필리핀은 왜 선진국이 못됐을까). 방탄소년단은 한국어로 노래를 불러도 세계인들이 열광한다. ‘아민정음’이 큰 인기라고 한다. 아민정음은 아미와 훈민정음의 합성어다. 막내를 ‘maknae’로, ‘누구’를 ‘nugu’로 쓰는 식으로 직역이 쉽지 않은 한국어를 발음과 비슷하게 알파벳으로 옮겨 적는 것을 뜻한다. BTS, 블랙핑크 등 K팝 가수에 대한 관심이 한국 문화는 물론 한국어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1997년에 처음 생긴 한국어능력시험에 3000명이 응시했는데 지난해에는 30만 명으로 25년 만에 100배가 늘었다고 한다. 서울 종로구는 한글 사랑 조례와 함께 ‘간판이 아름다운 거리 사업’을 통해 한글 간판 제작을 지원하고 있다. 영어 간판과 한글 간판, 세계인의 눈에는 어느 쪽이 가 보고 싶은 도시로 비칠까.

〈한글의 탄생〉을 쓴 노마 히데키 전 교수는 “한마디로 한글의 위상이 완전히 달라지면서 대단히 높아졌다. 무엇보다 지구상의 많은 이들이 한글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앞으로는 한글과 한국어가 세계의 문화를 선도해 갈 수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 장기적 접근 없인 성과 힘들어

부산시의회는 무리한 추진을 이유로 심사를 보류해 부산시의 영어상용도시에 제동을 걸었다. 심지어 같은 당인 김태효 국민의힘 시의원조차 “협약을 이렇게 시급하게 해야 할 이유가 있었느냐? 이견이 존재하는데도 제대로 된 설명조차 없다”라고 비판했다. 파주 영어마을의 경우 설립비가 991억 원에 달했다. 전국적으로 영어마을 설립에 1조 원이 넘게 든 것으로 추정된다. 자칫 실패한 사업 답습으로 예산 낭비와 사교육 부담만 키울 우려가 있는 게 사실이다. 엑스포를 위한 대책이라면 영어전문가를 키우는 데 집중하면 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서울과 인천 등의 사례로 볼 때 지자체장이 바뀌면 영어상용도시는 원점으로 돌아가기에 십상이다. 영어상용도시는 장기적인 계획을 갖지 않으면 가시적 성과를 내기 힘든 프로젝트다. 영어상용도시 관련 세부 추진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연구 용역을 내년에 착수할 계획이라고 한다. 여론을 잘 수렴하고, 지금까지의 실패 사례를 면밀히 검토하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부산시민들이 영어를 습득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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