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원 칼럼] 동해, 그 빛과 그림자

임성원 기자 fores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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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실장

‘동해선 역사’ 다룬 전시 인상적
남북 화해와 평화의 염원 담아
11월 동해는 목하 ‘전쟁의 바다’
북, 한·미에 맞서 미사일 도발
열강의 정세도 대결 구도 완연
한반도의 빛은 어둠을 극복할까

정금희 '불국사'. 부산프랑스문화원 아트스페이스 제공 정금희 '불국사'. 부산프랑스문화원 아트스페이스 제공

지난 주말 한 전시장을 서둘러 찾았다. 11월 6일까지 예정된 전시라 더는 늦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산프랑스문화원 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정금희 사진전 ‘동해선-역사(驛舍), 역사(歷史)’. 전시장 입구에서는 동해남부선 지도가 먼저 관람객을 맞았다. 부산진-범일-부전-거제-동래-해운대-송정-기장-일광-좌천-월내. 역사의 역사는 부산의 경계를 넘어 서생-남창-덕하-울산으로, 호계-모화-불국사-경주로, 나원-사방-안강-포항으로 이어졌다.

사진 속 동해로 가는(?) 동해선의 역사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채 깜박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빛의 예술’이라는 사진은 일출의 동해와 그 바다를 따라 뉘엿뉘엿 달리는 동해선, 그 기찻길을 점점이 잇는 역사의 불빛과 퍽 조화를 이루지 싶다. 동해선을 타고 가면 한반도에서 새해의 빛이 가장 먼저 닿는다는 이곳저곳의 사연을 만나게 되고, 역사에는 모였다 흩어지는 이런저런 삶의 편린들이 명멸하듯 흐른다.


동해는 빛의 바다이지만 그 빛을 잉태한 어둠의 바다이기도 하다. 금강산 관광 초창기인 1999년 초 유람선을 타고 공해를 경유해 남북을 오가며 만난 동해의 밤바다는 낮의 푸르름을 상상할 수 없는 칠흑의 바다였다. 그 어둠 속에서 분단의 명암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육지의 북쪽은 전깃불 하나 없는 암흑천지였고 남쪽은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눈이 부시게 환했다. 전력 사정에 따른 남북의 극단적인 명암은 비정상적인 분단 상황을 증명했다.

2022년 11월 동해는 목하 ‘전쟁의 바다’다. 북한이 동해로 미사일을 마구 쏘아 대고 있어서다. 지난 2일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동해 북방한계선(NLL) 남쪽 우리 영해 근처로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강원도 원산 일대에서 단거리 탄도미사일(SRBM) 3발을 발사했는데, 이 중 1발은 동해 NLL 이남 26㎞에 떨어졌고, 나머지는 속초 동방 57㎞, 울릉도 서북방 167㎞에 각각 낙하했다. 북한은 이날 10시간 동안 4차례에 걸쳐 모두 25발의 미사일 도발을 감행했고, 울릉도에서는 공습경보까지 발령됐다.

동해남부선을 이용하는 동남권 주민들을 더욱 놀라게 한 건 북한이 울산 앞바다에까지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발표를 하면서다. 북한군 총참모부는 “지난 2일 함경북도 지역에서 590.5㎞ 사거리로 남조선 지역 울산시 앞 80㎞ 부근 수역 공해상에 2발의 전략순항미사일로 보복 타격을 가했다”고 밝혔다. 우리 군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지만, 전략순항미사일은 핵탄두 탑재까지 가능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동해에서 지난 2~5일 진행된 한·미 연합 공중 훈련 ‘비질런트 스톰(Vigilant Storm)’에 맞서 북한은 급기야 3일에는 ‘화성-17형’으로 추정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까지 발사했다. 9일에도 동해상으로 SRBM 1발을 쏘았다. 이로써 북한은 올해 들어 38회에 걸쳐 미사일 도발에 나섰는데, 이는 2019년 13차례, 2020년 5차례, 2021년 7차례와 큰 차이를 보인다.

남북한과 일본에 둘러싸인 동해는 북한이 일본 넘어 태평양 건너 미국을 타깃으로 하는 군사 훈련장이 되었고, 한·미·일로서도 동북아의 공동 안보를 다지는 전략적 요충지로 자리매김했다. 동해로 미사일이 날아간다는 것은 곧 미국 본토를 넘볼 수 있다는 함의를 갖게 됐다. 북한이 미국 중간선거에 즈음하여 잇따라 무력 도발을 하는 건 핵 무력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한때 푸른 동해를 따라가는 동해선은 남북 화해와 평화의 상징이었다. 부산-포항의 동해남부선, 포항-삼척의 동해중부선, 삼척-제진역의 동해북부선을 지나면 곧장 북으로 들어간다. 북한의 금강산청년선과 이어져 함경남도 안변역, 나선특별시 나진역을 지나 두만강역에서 러시아 철도로 뻗어나간다. 한반도에서 유라시아 대륙을 달리는 푸른 꿈이 동해선에 있었다.

그 동해선의 꿈이 좌초 위기에 놓였다. 동북아의 전쟁과 평화는 이제 동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도 시시각각 강팔라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전쟁은 이미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고, 러시아와 중국의 권력구조도 날로 강고해지는 분위기다. 이런 사정이라면 동해선 연결은 앞으로 더디게만 진행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게다가 부울경 메가시티조차 좌초 위기에 놓여 부산과 울산의 통합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처지가 아닌가.

‘동해선-역사(驛舍), 역사(歷史)’의 작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과거는 빛으로 기록된다”며 “이 세상 먼지 하나도 그저 그냥 존재로 머무는 것은 없다”고 팸플릿에 적어 놓았다. 부산을 떠나 동해로 길을 잡은 동해선 기차는 지금 어느 역사쯤에서 시간의 궤적이라는 빛을 깜박이며 제 운명을 부려 놓고 있을까. 동해에 빛보다 그림자가 유난히 짙게 깔리는 11월이다.


임성원 기자 fores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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