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진의 여행 너머] 어떤 무지개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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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6월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사 건물에 내걸린 무지개 깃발. 올 6월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사 건물에 내걸린 무지개 깃발.

지난 여름, 국제행사 참석을 겸해 노르웨이 오슬로를 방문했을 때 조금 특별한 무지개를 만났다. 거리와 건물 곳곳에 무지개 깃발이 가득했다. 마침 ‘성소수자 축제의 달(Pride month)’이었다. 우리나라가 국경일에 태극기를 내걸 듯, 오슬로 시청을 비롯해 관공서마다 대형 무지개 깃발이 펄럭였다.

거리를 걸으며 무지개에 익숙해질 즈음, 다소 낯선 느낌을 받았다. 관공서인 듯 아닌 듯 빨간 벽돌건물 외벽에 쌍으로 내걸린 무지개 깃발. 건물의 정체는 고등학교였다. 학교 건물에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깃발이라니. 최근 새 교육과정에 ‘양성평등’ 대신 ‘성평등’ 용어를 쓰려다 논란이 된 우리나라로선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다.

하지만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하면 학교야말로 무지개가 어울리는 공간이다. 출신도 배경도 인종도 종교도 다른,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사회화를 배우는 학교는 ‘다양성’이 더욱 강조돼야 하는 공간이다.

무지개 덕분에 오슬로라는 도시가 새롭게 다가왔다. 거리 구석구석을 다녀도 동양인에 대한 낯선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들르는 가게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친절함이 묻어났다. 노벨상 중에서 유일하게 평화상 시상식만 스웨덴 스톡홀름이 아닌 오슬로에서 열리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오슬로가 지닌 다양성의 힘은 위기 상황에서 더 빛을 발했다. 체류 기간 끝 무렵인 6월 25일, 낮에 열릴 예정이던 성소수자 축제 ‘프라이드 퍼레이드(Pride Parade)’를 앞두고 새벽에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졌다.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도심의 한 호텔 성소수자 클럽 등지에서 총을 쏴 2명이 숨지고 20여 명이 다쳤다. 추가 테러를 우려한 경찰의 권고에 주최 측은 거리 행진을 취소했지만, 되레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연대의 뜻으로 수천 명이 모여 거리 행진을 벌였고, 행인들은 걸음을 멈추고 박수로 응원했다. 그날 오슬로는 폭력에 굴복하지 않고 다양성의 가치를 지켜냈다.

최근 카타르 월드컵에서도 무지개가 화두로 떠올랐다. 동성애 금지 등 카타르의 차별 정책에 반대하는 뜻으로 유럽 7개국 대표팀 주장이 ‘무지개 완장’을 착용하려 했지만, 국제축구연맹(FIFA)의 금지 결정으로 무산됐다.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여성에 대한 차별과 인권 탄압 등 카타르 월드컵은 세계인이 한마음으로 즐기기엔 많은 오점을 남겼다.

역대 개최국 중 유일하게 3경기 전패를 당한 카타르는 이번 월드컵에서 무엇을 얻었을까. 무지개 완장을 허용하고, 경기장마다 무지개 깃발이 내걸렸다면 어땠을까. 좀 더 많은 나라에서 무지개를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올 6월 노르웨이 오슬로의 한 고등학교 건물에 내걸린 무지개 깃발. 올 6월 노르웨이 오슬로의 한 고등학교 건물에 내걸린 무지개 깃발.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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