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8000명 수장”… 부산행 귀국선 ‘고의 폭침’ 짙은 의혹['방치된 비극' 우키시마호]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유족·시민단체 “일부러 폭발”
일 정부 ‘우발 사고’ 주장 반박
허술한 인양·뒤늦은 선체 수습
선체 정밀 조사 없이 민간 매각
사망자 숫자도 한·일 의견 충돌
진실 규명 시도 번번이 좌절
“정부의 강력한 의지 필요” 지적

1945년 8월 24일 일본 교토 마이즈루항 인근 해역에서 의문의 폭발과 함께 침몰한 우키시마호. 우키시마호는 광복 직후 일본 오미나토항에서 강제동원된 한국인과 그 가족들을 태우고 부산으로 향했던 ‘1호 귀국선’이다. 마이즈루모임 제공 1945년 8월 24일 일본 교토 마이즈루항 인근 해역에서 의문의 폭발과 함께 침몰한 우키시마호. 우키시마호는 광복 직후 일본 오미나토항에서 강제동원된 한국인과 그 가족들을 태우고 부산으로 향했던 ‘1호 귀국선’이다. 마이즈루모임 제공

1945년 8월 22일 오후 10시께. 일본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에서 4730t급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호가 출항했다. 일본의 항복 선언에 따라 강제징용된 한국인과 그 가족을 본국으로 송환하기 위해서다. 해방과 귀향의 기쁨으로 가득 찬 ‘부산행 귀국선’이었다.

그러나 배는 돌연 당초 목적지가 아닌 교토 마이즈루항으로 향했다. 부산 직항로를 벗어나 일본 해안선을 따라 내려갔다. 그리고 이틀 뒤인 8월 24일 오후 5시 20분, 육지와 300m가량 떨어진 마이즈루만 시모사바가 앞바다에서 의문의 폭발과 함께 물속에 잠겼다. 수천 명의 한국인 노동자들은 그리던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그렇게 희생됐다.




■일본, 고의 폭침했나

1945년 9월 1일, 일본 정부는 우키시마호 침몰이 미군 기뢰에 의한 우발적 사고였다고 발표했다. 배가 가라앉은 지 불과 일주일 만이다. 그러나 유족과 시민단체는 이후 생존자 증언, 해군 승무원 진술 등을 토대로 일본이 배를 일부러 폭발시켰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오미나토해군공작부가 그간의 전쟁 범죄를 은폐하고 한국인들의 폭동을 피하고자 배를 고의로 폭침시켰다는 것이다. 배에 탄 일본 해군이 한국에서의 보복을 우려해 자폭을 감행했다는 말도 나온다. 침몰 원인을 둘러싼 논란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우키시마호 고의 폭침 의혹은 점점 짙어졌다. 실제 출항 직전 함장 앞으로 ‘1945년 8월 24일 오후 6시 이후 항해를 금지한다’는 명령이 떨어졌다는 사실이 추후 밝혀졌다. 배가 항해 금지 이전까지 부산에 도착할 수 없다는 점을 알면서도 출항을 강행했다는 것이다. 애초 목적지가 부산항이 아니었다는 의혹이 나오는 이유다. 당시 함장은 생전 인터뷰에서 “그런 명령을 듣지 못했다”며 이를 부인했다.

배를 인양한 이후에도 선체 조사자 등은 내부 철판이 안에서 밖으로 휘었다고 진술했다. 외부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면 반대로 휘었어야 한다는 얘기다. 생존자들은 보통의 기뢰 폭발처럼 물기둥도 솟지 않았다고 진술한다.



■엇갈린 사망자 집계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밝힌 사망자 수는 모두 549명이다. 3735명이 탑승해 한국인 524명, 일본 해군 25명이 숨졌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한국 유족과 시민단체는 실제 승선자가 1만 2000명에 이르고, 사망자 수도 8000명이 넘을 것으로 본다.

2014년에는 탑승 인원이 8000여 명이었다는 일본 외무성 기록문서가 공개되기도 했다. 침몰 5년 후 나온 우키시마호 인양요청서다. ‘아오모리현 오미나토 해군항 시설 공사에 사역한 조선인 노동자와 그 가족 등 8000여 명을 태우고 오미나토항을 출항했다’는 문구를 담고 있다. 오미나토를 중심으로 한 시모키타 반도에서는 수많은 한국인이 군사 터널, 참호, 철도 등의 건설에 동원돼 강제노역했다.

생존자들도 당시 ‘고국에 돌아가는 마지막 배’라는 소문이 나서 너나 할 것 없이 배에 올랐다고 증언한다. 갑판, 선실, 화물칸 등에 사람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들어찼다고 한다. 침몰 당시를 목격했던 마이즈루 마을 주민은 “일주일 이상 밤낮 없이 기름으로 뒤덮인 새까만 시체가 떠내려왔다”고 말했다.

우키시마호 선체 수습이 뒤늦게 이뤄진 탓에 당시 정확한 사망자 수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키시마호는 침몰 이후 무려 9년이 지난 1954년 10월 인양됐다. 선체는 정밀 조사 없이 민간기업에 고철로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단체는 허술한 인양 작업으로 선체에 있던 유골이 물속으로 우르르 쏟아졌다고 주장한다. 2012년 뒤늦게 수중 조사에 나섰으나 이미 펄로 뒤덮인 뒤였다. 건져진 유골 중 상당수가 인근 산이나 동굴에 집단 매장됐다고도 말한다.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회 전재진 대표는 “양국 전문가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학술토론회를 열어 탑승객, 희생자, 실종자, 생존자 수를 면밀하게 검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메아리 없는 ‘외침’

우키시마호 참극의 진실 규명은 그간 수차례 시도됐다. 한·일 양국에서 관련 영화, 다큐멘터리가 여럿 제작되고 증언집도 출간됐다. 2003년 3월에는 남북 역사학자가 한자리에 모이는 학술토론회가 열렸으며, 1999년에는 남북공동조사단 결성이 추진됐다. 관련 토론회도 평양, 일본, 서울 등 곳곳에서 열렸다. 유족과 시민단체는 진실 규명을 위해 대통령과 외교부, 정치권 등에 여러 차례 ‘SOS’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적, 외교적 문제가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 양국 정권 교체에 따라 한·일 관계가 급변하면서 강제징용 배상이나 우키시마호 진실 규명 논의도 후퇴하기 일쑤였다. 유족과 시민단체 측은 “흩어진 우키시마호 파편을 맞추려면 민간뿐 아니라 한국 정부의 의지가 필수”라고 입을 모았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