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수평 맞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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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아 소설가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일들에 후순위로 밀려버려서 매번 못하게 되는 것이 있다. 내게는 영상 시청이 그런 일 중 하나다. 영화도 드라마도 참 좋아하지만 좀처럼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일단 소설을 쓰는 시간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니까. 노트북을 열면 반나절은 금세 지나가 버린다. 마감일이 정해진 다른 일거리가 있을 때에는 그 시간마저도 확보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눈앞의 책들은 서로 자신을 먼저 펼치라며 아우성을 치고, 먼지와 빨래와 설거지거리는 치우고 돌아서면 미스터리하게도 또 쌓여 있는 것이다. 요즘은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와의 감정소모전과 그로 인한 마음 수양의 시간도 상당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보고 싶은 영화들은 체크만 해두었다가 결국 막이 내릴 때까지 보러 가지 못하고, OTT에는 하트 표시를 해둔 콘텐츠들이 늘어만 간다. 그러다 며칠 전 급체를 하는 바람에 꼬박 하루 동안 토하고 먹지 못한 채 누워 있게 되었는데, 그 덕에 모처럼 넷플릭스를 종일 시청했다. 몸이 멀쩡한 상태에서는 우선순위에 있는 일들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으니, 가끔은 이렇게 아픈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하면서. 그날 내가 보았던 영상은 사이비 종교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고발하여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다큐멘터리였다. 급체를 한 상태로 위장을 부여잡고 보기에는 어쩌면 적절치 않은 영상이었을 것이다. 보는 내내 속은 더 울렁거리고 두통도 점점 심해졌으니까.

방송이 이슈가 되니 그에 대한 기사도 연이어 나오고 있다. 방송을 본 사람들은 사이비 종교의 충격적인 실상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교주와 신도들을 비난한다. 그런데 어떤 말들은 그 비난의 초점이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맞춰져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다. 누가 봐도 이상한 집단인데 왜 그곳에 있었던 거냐는 식의 비난들. 그런 식으로 피해자를 탓하는 말들이 쌓이면 가해자의 잘못은 교묘하게 묻혀버린다. 비단 이런 상황에서 뿐만이 아니다. 성범죄 피해자에게 왜 가해자와 단둘이 있었느냐고 캐묻고, 그때는 가만히 있어놓고 왜 이제 와서 고발하느냐고 진의를 의심한다. 약취와 유인을 당한 미성년자에게 왜 모르는 사람을 따라 거기까지 갔냐고 추궁하고, 부모에게는 아이 교육도 제대로 안 시키고 대체 뭐한 거냐고 힐난한다. “네가 당할 만하게 행동했으니까 피해를 당한 거지.”라는 식의 2차 가해는 상대에 대한 특별한 악의도 없이, 천진하고도 무구하게, 그것이 당연한 상식이라는 듯이 벌어진다. 힘겹게 가해자의 마수로부터 빠져나오고 겨우 용기를 내어 세상을 향해 입을 연 피해자들은 그 순간 더욱 상처 입고 움츠러든다.

모든 상황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정중앙에 서서 판단하는 것은 얼핏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시소의 한쪽 편에는 거구의 성인 남자가, 다른 한쪽 편에는 어린 소녀가 타고 있다고 치자. 높이 올라간 채로 내려오지 못해 울고 있는 소녀에게 “시소에 탄 네가 문제지. 그러게 거길 왜 올라갔어!”라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공정함은 시소의 가운데 서 있을 때가 아니라, 약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시소의 수평을 평평하게 맞추어줄 때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어린 소녀가 앉았던 자리에 나를 대입해보는 마음, 그 애의 어떤 약한 부분을 건드렸기에 소녀가 시소에 앉게 되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마음, 그리고 “거기서 내려오지 못했던 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다독여주는 마음. 피해 사실을 힘겹게 증언하는 이들을 볼 때 우리에게는 그런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에서조차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다며 과거 일제 강점의 피해자였던 우리 민족을 질책하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피해자의 상처를 진심으로 어루만지고 위로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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