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주말] 스필버그의 고백 ‘파벨만스’…인종차별 실화 ‘틸’
요리 연구가이자 외식사업가인 백종원 씨는 SBS 예능 프로그램 ‘골목식당’에서 한 주꾸미집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백 씨는 쉰내 나는 저질 주꾸미 요리를 내놓은 업주 형제에게 크게 분노해 “공짜라도 안 온다”며 “다 만만해 보이죠?”라고 직격했습니다.
코미디언 박성광이 메가폰을 잡은 ‘웅남이’는 이와 비슷한 혹평을 받았습니다. ‘씨네21’의 이용철 평론가가 10점 만점에 3점을 매기며 “여기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을까”라는 한 줄 평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누리꾼들은 ‘텃세를 부리는건가’ ‘특권의식이 보인다’ ‘영화계가 뭐 그리 대단하냐’ 등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영화의 내용이나 완성도가 아니라, 코미디언이라는 박성광 감독의 ‘출신’을 비하한 것으로 해석돼 부적절하다는 겁니다.
다만, 수준 미달 작품을 내놨다면 ‘관객이 만만해 보이냐’는 비판은 온당한 것이 됩니다. 코로나19를 핑계로 만 원을 훌쩍 넘겨버린 티켓 값을 내고 영화관을 찾은 관객들은 최소한 쉰내는 나지 않는 작품을 맛보고 싶을 겁니다. ‘웅남이’와 같은 날 개봉한 외화 두 편은 이러한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영화입니다.
영화 같은 스필버그의 인생 스토리 ‘파벨만스’
지난 22일 개봉한 ‘파벨만스’는 자타공인 영화계 거장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영화입니다. 스필버그가 영화감독의 꿈을 품게 된 계기와 영화를 향한 그의 순수한 사랑이 담겼습니다.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새미 파벨만(가브레일 러벨 분)의 성장과정은 스필버그 감독의 유년시절과 일치합니다. 유능한 공학자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새미는 1952년 1월 부모와 함께 생애 처음으로 찾은 극장에서 ‘지상 최대의 쇼’를 보고 영화의 세계에 눈을 뜹니다. 단숨에 영화와 사랑에 빠진 새미는 그날부터 아빠 버트(폴 다노 분)의 8mm 카메라로 일상을 촬영하기 시작합니다. 엄마 미치(미셸 윌리엄스 분)의 말대로 파벨만에게 영화는 ‘절대 잊을 수 없는 꿈’이 되었습니다.
새미는 10대가 돼서도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가족들의 모습을 필름에 남기고, 보이스카우트 친구들을 배우로 섭외해 극 영화까지 만들면서 감독의 꿈을 키웁니다. 하지만 카메라가 항상 즐거움만 안겨준 것은 아닙니다. 가족 여행 중 촬영한 영상을 편집하던 새미는 아버지의 절친인 베니(세스 로건 분)와 엄마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흐른 장면을 포착합니다. 충격을 받은 새미는 영화에 대한 열정까지 잃어버리고 카메라를 들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게다가 고등학교에선 반유대주의 동급생들에게 학교폭력을 당하며 마음이 꺾일 위기에 놓입니다.
3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새미 역을 따낸 신예 가브리엘 라벨의 연기는 눈부시고, 가족을 끔찍이 사랑하지만 남편을 떠나야만 하는 엄마 역을 맡은 미셸 윌리엄스는 놀라운 호연을 펼쳤습니다. 데이비드 린치가 연기한 ‘서부극의 1인자’ 존 포드 감독의 등장은 씨네필을 위한 이스터 에그입니다.
이 작품으로 올해 1월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스필버그 감독은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라 영화화를 주저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스필버그는 엄마의 불륜 사실을 60년 넘게 비밀로 유지했다고 합니다. 그는 “모두가 저를 성공 신화로 보지만, 모두에게 말할 용기를 낼 때까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다”며 “내가 이 이야기를 언제 할 수 있을지 알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고, 74세가 돼서야 ‘지금이야’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고 밝혔습니다.
영화는 결국 가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애증의 부부 관계, 부모와 자식 간 사랑과 다툼은 누구나 공감할 법합니다. 쏟아지는 명대사에는 예술과 가족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했던 스필버그 감독의 고뇌가 녹아있습니다. 스필버그는 “이 영화를 통해 관객 여러분의 가족이 보였으면 좋겠다”고 소망했습니다. 유년시절을 고증하는데 애를 쓴 그는 촬영 도중 수차례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미국 CBS 인터뷰에서 스필버그는 완성된 집 세트장이나 부모 역을 맡은 폴과 미셸의 모습이 실제와 유사해 울컥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바이든이 주목한 영화 ‘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2월 워싱턴DC에 있는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영화 상영회를 개최했습니다. 그는 상영회에 앞서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진실, 국가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조명하는 것”이라며 “위대한 국가는 역사를 전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 영화가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조명한 영화의 제목은 지난 22일 한국서 개봉한 ‘틸’입니다. ‘틸’은 1955년 8월 친척들이 사는 미시시피주 소도시에 여행을 떠난 흑인 소년 ‘에밋 틸’(제일린 홀 분)이 백인들에게 납치 살해 당한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영화는 틸의 어머니 메이미(다니엘 데드와일러 분)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분투한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남편이 전사한 메이미에게 하나뿐인 14살 아들 에밋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두 사람은 시카고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지만, 에밋이 인종차별이 극심한 미시시피로 여행을 떠나려 하자 메이미는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백인들을 함부로 쳐다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에밋을 겨우 보냈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미시시피주 소도시 머니에 도착한 에밋은 친척들과 평범한 일상을 보내다가 위기에 처합니다. 식료품 가게에서 일하던 백인 여성 캐롤린 브라이언트(헤일리 베넷)의 외모를 칭찬하고 휘파람을 불었던 게 화근이었습니다. 에밋과 사촌들은 총을 쏘려던 캐롤린에게선 간신히 벗어났지만, 캐롤린의 남편 로이 브라이언트와 시동생 J.W. 밀람이 결국 에밋을 찾아내고 맙니다. 두 백인 남자는 한밤중에 에밋을 끌고 가 극심하게 폭행하고, 사흘 뒤 에밋은 강가에서 숨진 채 발견됩니다.
당시 틸의 어머니는 처참하게 살해당한 아들의 시신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관 뚜껑을 연 채로 장례식을 진행했습니다. 두 백인 남자는 살인 혐의로 기소됐지만 늘 그렇듯 유족을 비난하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몹쓸 인간들이 여론을 혼탁하게 만듭니다.
제일 큰 문제는 미시시피주를 지배하던 ‘안티 블랙 시스템’입니다. 애당초 이 곳은 백인이 흑인 인권운동가를 죽여도 기소조차 되지 않던 지역입니다. 에밋의 시신을 발견했던 백인 보안관은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하는 것도 모자라 메이미의 진의와 뒷배를 의심합니다. 백인 판사와 12명의 백인 배심원단은 틸을 살해한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엉터리 평결은 흑인 인권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엄마 메이미는 필연적으로 투사가 됩니다.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메이미 역을 맡은 다니엘 데드와일러의 열연입니다. 아들을 잃은 엄마의 울분과 정의를 되찾으려는 굳은 결의를 온몸으로 되살려 냈습니다. 메이미가 내뱉는 의미심장한 대사들은 자유와 평등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끔 합니다. 다만 다소 늘어지는 전개와 단조로운 연출은 아쉬운 점으로 남습니다.
사건 당시 중요 인물이었던 캐롤린 브라이언트 던햄은 지난해 미국 현지에서 다시 화제로 떠올랐습니다. 67년 전 21살이던 캐롤린은 틸이 휘파람을 불며 자신을 희롱하고 음담패설과 성추행까지 했다고 진술한 바 있습니다. 미국 연방 법무부는 2004년과 2018년 이 사건을 재조사했지만 이렇다 할 결론을 내지 못하고 수사를 종결했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6월 캐롤린 앞으로 발부된 ‘미집행’ 영장이 르플로어 카운티 법원 지하에서 발견되면서 반전이 기대됐습니다. 검찰은 그가 납치 및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러나 르플로어 카운티 법원 대배심은 두달 뒤 연 심리에서 증거부족 등을 이유로 캐롤린을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작년 3월 에밋의 이름을 딴 ‘에밋 틸 반(反)린치법’에 서명한 바이든 대통령은 ‘틸’ 상영회 때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과 폭력을 당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면서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 현실 부정은 더 나쁘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차별과 증오는 다양성을 거부하지만, 그 표적 만큼은 다양합니다. 스필버그 감독은 지난 4일 미국 CBS 방송에서 최근 반유대주의가 급증하는 현상이 놀랍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반유대주의는 항상 존재했다. 시야에서 살짝 벗어나 잠복해 있거나, 1930년대 독일처럼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반유대주의가 숨어있지 않고 마치 히틀러와 무솔리니처럼 옆구리에 손을 얹은 채 당당하게 서 있는 것은 30년대 독일 이후로 본 적이 없다”며 “내 평생, 특히 이 나라(미국)에서는 이런 것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고 경악했습니다.
그는 이어 “하지만 다수 인종에 속하지 않은 사람을 소외시키는 행태가 몇 년 동안 우리를 향해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다”면서 “증오가 미국에서 일종의 클럽 회원이 됐고, 이 클럽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회원을 모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그러면서도 안네 프랑크의 말을 인용해 “프랑크는 대부분의 사람이 선하다고 했고, 나는 그 말이 옳다고 본다”며 “본질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는 선함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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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