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김장하’ 보유 도시…진주보다 빛나는 ‘진주 정신’을 찾아서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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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남강 둔치에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세운 ‘형평운동기념탑’. 남녀 동상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김장하 선생은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진주 남강 둔치에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세운 ‘형평운동기념탑’. 남녀 동상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김장하 선생은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올해 초 MBC경남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가 전파를 타면서 전국에 큰 울림을 줬다. 김장하 선생은 경남 진주시에서 오랫동안 한약방을 운영하며 소외 이웃과 사회 약자를 묵묵히 도왔다. 선생의 조건 없는 나눔과 베풂을 이야기하면, ‘진주 정신’이 함께 거론된다.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고장 진주(晉州)엔 어떤 정신이 스민 걸까. 영롱한 진주(眞珠)보다 빛나는 진주 정신을 찾아 진주로 향했다.


장군부터 백성까지, 10배 왜군에 맞서다

김장하 선생은 평생 차 한 대 없이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다녔다. 이왕 진주 정신의 흔적을 따라가 보기로 한 만큼, 이번 진주시내 여정은 두 발과 두 바퀴에만 맡겨 보기로 했다.

부산에서 1시간 반쯤 달려 도착한 진주시외버스터미널(남강로 712). 첫 목적지는 김시민 장군과 논개의 얼이 서린 ‘진주성’(남강로 626)이다. 터미널에서 진주성공북문매표소까진 채 1km가 안 되는 거리다. 절반쯤 걸었을까. 길 건너 빛바랜 파란색의 ‘남성당한약방’(남강로 677-1)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김장하 선생의 나눔이 시작된 평생의 일터다. 아쉽게도 지난해 5월 문을 닫아 내부를 둘러볼 순 없다. 최근 진주시에서 건물 보존을 결정했고, 후원 문화를 교육하는 성격의 공간으로 연말께 문을 열 예정이다.

진주성은 역사적인 유적지이면서 진주 시민들이 산책 겸 즐겨 찾는 장소다. 그만큼 진주 정신이 진주민의 일상 속에 스며들었을 터. 입장료를 내고 공북문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김시민 장군 동상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진주목사 김시민은 1592년 10월 임진왜란 때 벌어진 제1차 진주성 전투를 진두지휘하며 3800명의 군사와 백성으로 왜군 3만 명을 물리쳤다. 김시민의 진주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도대첩, 권율의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힌다.

임진왜란 전문 전시관인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각종 무기류. 임진왜란 전문 전시관인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각종 무기류.
조선·명나라 연합군과 일본군의 전투 장면을 그린 '울산왜성전투도'. 조선·명나라 연합군과 일본군의 전투 장면을 그린 '울산왜성전투도'.

임진왜란과 진주의 저항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면 국립진주박물관에 꼭 들러야 한다. 진주성 내 서쪽에 위치한 국내 유일의 임진왜란 전문박물관이다. 전시실 이름부터 ‘임진왜란실’이다. 1592년부터 7년 동안 조선과 일본·명나라 사이에 벌어진 ‘동아시아 전쟁’, 임진왜란의 서막부터 결과와 영향까지 찬찬히 살펴볼 수 있다.

부산진순절도·동래부순절도·평양성전투도·울산왜성전투도 등 당시 전황을 자세히 묘사한 그림(복제본)은 400여 년 전 그날을 생생하게 전한다. 당시 전투에 쓰인 무기류도 눈길을 끈다. 활·칼·창·철퇴 등 전통적인 무기부터 총통·조총 등 화약 무기의 발달상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전시실 입구에 마련된 승자총통 체험시설은 학생·어른 할 것 없이 참여해볼 만하다. 대형 스크린 앞에서 모형 승자총통을 들고 게임하듯 왜군을 무찌르는 실감 콘텐츠다. 10분 동안 3단계(훈련·한산도대첩·진주대첩) 미션을 마친 뒤 점수표에 해당하는 ‘공신교서’를 받아보는 재미도 있다.

진주박물관 전시실 입구에 있는 승자총통 체험시설에서 게임처럼 즐길 수 있는 실감콘텐츠. 진주박물관 전시실 입구에 있는 승자총통 체험시설에서 게임처럼 즐길 수 있는 실감콘텐츠.
진주성벽에서 바라본 촉석루. 멀리 남강을 가로지르는 진주교가 보인다. 진주성벽에서 바라본 촉석루. 멀리 남강을 가로지르는 진주교가 보인다.

백정도 평등한 세상, 남강은 차별 없이 흐르네

진주성은 일반인에겐 ‘촉석루’로 더 잘 알려졌다.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왜장을 껴안은 채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한 논개의 얼이 서린 누각. 진주시내 곳곳에 그려진 처마 모양 공공디자인은 촉석루의 상징성을 짐작케 한다. 촉석루에 올라 바라보는 남강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진주교가 강을 가로지른다. 교각을 따라 황금빛 대형 쌍가락지가 매달려 있다. 왜장을 껴안은 손깍지가 풀리지 않도록 논개가 열 손가락에 꼈다는 반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촉석루 아래 남쪽 벼랑으로 난 문은 실제로 논개가 순국한 바위인 ‘의암’으로 이어진다. 바위 벽면엔 한자로 의로운 바위(義巖)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의암 바로 아래 물은 그다지 깊어 보이지 않는데, 남강댐이 생기기 전엔 수위가 훨씬 높았다고 한다.

촉석루 서쪽엔 논개의 넋을 기리는 사당 ‘의기사’가 있다.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셨는데, 그림 속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논개의 눈매가 인상적이다.

촉석루 남쪽 벼랑으로 내려가면 있는 의로운 바위 '의암'.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순국한 역사적인 바위이다. 촉석루 남쪽 벼랑으로 내려가면 있는 의로운 바위 '의암'.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순국한 역사적인 바위이다.
논개의 넋을 기리는 '의기사'에 모신 논개 영정. 논개의 넋을 기리는 '의기사'에 모신 논개 영정.

임진왜란 때 왜군과 맞선 진주민의 의열한 기상은 근대민중운동으로 이어진다. 19세기 진주농민항쟁과 동학농민운동을 거쳐 1909년 우리나라 최초 지방신문인 <경남일보>가 진주에서 창간됐다. 경남에서 가장 먼저 3·1운동이 시작된 곳도 진주다. 특히, 100년 전 1923년 4월 강상호 선생을 비롯한 사회운동가들이 백정 지도자들과 연대해 ‘형평사(衡平社)’를 설립하고, 백정신분해방운동인 ‘형평운동’을 일으켰다. 고기를 재는 저울(衡)처럼 평등한(平) 세상을 만들고자 한 우리나라 최초 인권운동이다. 형평운동에 담긴 공평·애정·연대 정신은 평소 김장하 선생이 강조해 온 가치이기도 하다.

차별 없이 두루 품어 유유히 흐르다 낙동강과 만나는 남강 역시 형평운동의 정신과 닮았다. 진주교를 건너 남강변을 따라 동쪽으로 1km쯤 걸어가면 ‘형평운동기념탑’이 나타난다. 가슴을 활짝 편 남녀가 함께 손잡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동상의 자태에서, 자유와 평등을 향한 열망이 느껴진다. 이 기념탑은 1996년 형평운동기념사업회에서 세웠는데, 김장하 선생이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이라.’ 기념탑에 새긴 형평사 창립선언문 첫머리 문구가 묵직한 울림을 준다.

진주 정신을 떠나 남강은 그 자체로 즐겨도 좋다. 진주시에서 운영하는 무료 자전거 대여소(4곳)를 이용하면 강변 자전거길을 따라 남강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다. 걸을 땐 수십 분 거리가 페달을 밟으면 몇 분이면 족하다.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 강 건너에서 바라본 촉석루와 진주성은 한층 웅장하게 다가온다.

진양호 쪽으로 좀 더 달리면 곡선의 지붕이 인상적인 ‘물빛나루쉼터’(망경로 195)가 있다. 바로 앞 망진나루에서 유람선(김시민호)을 타면 남강과 진주성을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물빛나루쉼터를 포함하는 ‘소망진산 유등공원’의 꼭대기 정자에 오르면 남강과 진주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남강 건너 자전거도로에서 바라본 촉석루와 진주성. 남강 건너 자전거도로에서 바라본 촉석루와 진주성.
남강유람선(김시민호)를 탈 수 있는 '물빛나루쉼터'. 강변을 따라 자전거길이 시원하게 조성돼 있다. 남강유람선(김시민호)를 탈 수 있는 '물빛나루쉼터'. 강변을 따라 자전거길이 시원하게 조성돼 있다.

향토음식과 새 명물, 다채로운 ‘진주의 맛’

진주는 역사의 고장답게 전통 맛집도 여럿이다. 이름 앞에 지명이 들어가는 진주비빔밥과 진주냉면은 전국구 향토음식이다. 진주중앙시장의 오래된 가게 ‘제일식당’은 3대째 육회비빔밥을 전문으로 한다. 진주비빔밥은 다양한 나물 위에 얹은 육회가 특징인데, 양념이 과하지 않아 남녀노소 두루 즐기기 좋다. 육회를 못 먹는 이들을 위해 익혀주기도 한다.

중앙시장과 연결된 진주논개시장에는 ‘덕인당’ 꿀빵이 간식거리로 유명하다. 땅콩 가루를 입혀 튀긴 후 시럽을 바른 겉은 바삭하게 달콤하고, 단팥 앙금을 넣은 속은 부드럽게 달콤해 재밌는 식감이다.

진주중앙시장에서 3대째 이어 가고 있는 '제일식당'의 육회비빔밥. 진주중앙시장에서 3대째 이어 가고 있는 '제일식당'의 육회비빔밥.
진주냉면 전통의 맛을 볼 수 있는 '하연옥'의 물냉면. 진주냉면 전통의 맛을 볼 수 있는 '하연옥'의 물냉면.

본점 진주를 넘어 서울에 지점을 낸 ‘하연옥’에선 진주냉면 전통의 맛을 볼 수 있다. 육전과 소고기, 달걀과 형형색색 지단을 얻은 모양새만으로도 입맛을 돋운다. 물냉면의 진한 육수를 살얼음과 함께 들이켜면, 여행객의 지친 발걸음을 충전하는 데 제격이다.

진주성 공북문 맞은편 ‘진주운석빵’은 새로운 명물이다. 2014년 진주에 떨어진 운석을 본떠, 검은 빛깔에 울퉁불퉁한 모양이다. 흰콩·밤·견과류가 들어간 앙금과 아몬드가루·천연오징어먹물 등 고급 재료를 써서 가격은 저렴한 편이 아니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진주논개시장의 유명 간식거리인 '덕인당'의 꿀빵. 진주논개시장의 유명 간식거리인 '덕인당'의 꿀빵.
2014년 진주에 떨어진 운석을 본떠 만든 '진주운석빵'. 2014년 진주에 떨어진 운석을 본떠 만든 '진주운석빵'.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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