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물, 술이 되다…‘꽃잠’ 잔 듯 몸도 마음도 건강한 막걸리 [술도락 맛홀릭] <9>
[술도락 맛홀릭] <9> 경남 함양 '지리산옛술도가'
가가호호 술을 빚던 시절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던 가양주(家釀酒) 문화가 100년 만에 다시 부활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급된 지역특산주 면허만 1400건에 이르고, 해마다 새로운 양조장과 전통주가 탄생한다.
전통주엔 지역의 특색이 오롯이 담겼다. 지역에서 나는 재료로 술을 빚어, 특산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부산일보>는 ‘술도락 맛홀릭’ 기획시리즈를 통해 부산·울산·경남 지역의 전통주 양조장을 탐방하고, 지역의 맛과 가치를 재조명한다. 이지민 대동여주도 대표 등 전통주 전문가도 힘을 보탠다.
지리산 청정 지하수가 샘솟는 경남 함양군의 한 마을. 10년 전 도시에서 귀촌한 부부는 작은 양조장을 차렸다. 부부가 빚은 술은 시나브로 입소문이 나 애주가들 사이에서 지리산 하면 떠올리는 막걸리가 됐다. 특히, 지리산 흑돼지와 찰떡궁합이라는 그 술을 찾아 나섰다.
■ 6평으로 시작한 작은 술공방
함양읍내에서 30분 남짓. 구불구불 지안재와 오도재를 넘어 마천면 금계마을로 들어서자 지리산둘레길 함양군안내센터가 나타난다. 지리산둘레길 중 가장 아름답다는 3코스(남원 인월~함양 금계)의 시종점이다.
마을 골목길을 따라 얼마쯤 올라갔을까. 새들의 지저귐이 유난스러운 주택이 눈에 들어온다. ‘지리산옛술도가’ 입간판이 양조장임을 알린다. 입구 앞엔 커다란 소쿠리 위에 고운 빛깔의 ‘흙’이 펼쳐져 있다. 술의 핵심 재료인 우리밀 누룩이다.
“술을 빚기 전 누룩에 햇볕을 쬐고 이슬을 맞히는 ‘법제’를 3일 정도 합니다. 누룩 속 잡균은 없애고, 좋은 균의 힘을 북돋아주죠. 이 마을은 공기도 맑고 자연 조건이 아주 좋거든요.”
수도권에서 도시 생활을 하다 아내와 귀촌을 결심한 송승훈(50) 대표는 2013년 지리산 천왕봉이 한눈에 보이는 이 마을에 자리잡았다. 정착할 곳을 찾아 주말이면 거창·산청·하동·남원 등 지리산권을 돌아다녔다. 1년이 흘러 점점 지쳐갈 때쯤, 빈집이 나타나 둥지를 텄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가장 먼저 방문했던 함양이었다.
처음엔 민박집을 운영하다 2016년 양조장을 차렸다. 생계를 위해서였다.
“6평짜리 남는 방이 하나 있었어요. ‘소규모 주류제조 면허 제도’가 시행된다는 한 줄 뉴스를 우연히 보고 ‘저거다!’ 싶었죠. 어차피 우리 부부가 술을 좋아하니 안 팔리면 우리가 마시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정말 안 팔렸어요. 하하.”
통장 잔고가 4만 원으로 줄었을 때 또 한 번 우연처럼 길이 열렸다. 소규모 주류제조 면허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술이 출시됐다는 소식을 듣고 전통주 전문가인 류인수 한국가양주연구소 소장이 들른 것이다. 류 소장은 막걸리 여러 병을 사 들고 가 주변에 맛을 보였다. 이후 전통주 애호가와 전통주 전문점 등지로 입소문이 나며 조금씩 판로가 생겼다.
‘둘레길 하우스 막걸리’ 양조장으로 시작해 2018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면서 지역특산주 면허를 취득했다. 덕분에 옛술도가의 술은 온라인에서도 만나 볼 수 있다. 양조장 공간도 10평을 더했고, 지난해엔 민박동을 개조한 30평짜리 한 동을 추가해 한층 규모가 커졌다.
■ 도초도, 어머니의 양조법 그대로
시간이 흐르면서 제조법을 달리하는 여느 양조장과 달리 지리산옛술도가의 술은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큰 변화 없이 한결같다. 어머니의 레시피를 송 대표가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고향인 신안군 도초도에서 술을 빚던 전통 방식이다.
대표술인 ‘꽃잠막걸리’(6도)는 한 번 빚은 단양주, 탁주 ‘은가비’(8도)와 약주 ‘여여’(15도)는 세 번 빚은 삼양주다. 재료는 쌀과 누룩, 마을 상수원인 지리산 지하수, 3가지가 전부다.
“저희는 갓 도정한 함양쌀을 씁니다. 쌀뜨물이 안 나올 때까지 백세(쌀씻기)를 한 뒤 8~12시간 불렸다가 고두밥을 쪄서 누룩과 함께 치대는데, 발효조를 아침·저녁 하루 두 번 저어 줍니다. 발효 과정에서 탄산이 형성되는데, 아무리 마셔도 불쾌한 트림 같은 게 전혀 안 생기더라고요. 그만큼 천연탄산이 좋다는 거죠.”
단양주(꽃잠)의 발효 기간은 8~11일, 삼양주(은가비)는 한 달 정도다. 은가비는 밑술에 덧술을 더해 효모를 안정적으로 배양한 뒤 고두밥을 한 차례 더 넣는다. 삼양주의 핵심인 밑술은 쌀가루에 찬물부터 부은 뒤 끓는 물을 붓는 ‘반생반숙’ 방식인 점이 특징. 끓는 물로만 범벅을 하는 ‘익반죽’보다 훨씬 술맛이 좋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특히 맑은 술인 ‘여여’는 같은 삼양주인 은가비의 맑은 부분만 거르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별도로 빚는다. 원주부터 다른 술인 여여는 완성되기까지 100일이나 걸린다.
지리산옛술도가의 출발은 가벼웠지만, 술빚기에 대한 고민과 철학은 자못 진지하다. 송 대표 부부는 우리 술의 가치와 전통주가 처한 환경에 대해 알게 되면서 3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우리 쌀·누룩 등 우리 것만 재료로 쓸 것. 둘째, 전통 고유의 방식대로 빚을 것. 셋째, 술 문화의 본연을 지향하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날을 아내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우리가 지향할 전통주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요. 3가지 원칙을 한마디로 하면 저희집 가훈이자 사훈인 ‘주량이 도량이다’입니다.”
■ 20대 청년처럼, 사람을 닮은 술
지리산옛술도가의 술은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술마다 지닌 특징에 어울리는 단어를 고르고 또 골라 탄생한 이름이다.
꽃잠막걸리의 ‘꽃잠’은 깊이 든 잠을 말한다. 잠을 잘 자야 삶이 생생하듯, 좋은 술을 마셔야 인생이 깊어진다는 의미를 담았다. 신맛·단맛·쓴맛을 지녔는데, 그중 신맛이 중심을 이룬다. 삼양주인 ‘은가비’는 은은한 가운데 빛을 발한다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사람으로 치면 불혹의 인생 같은 술이라는 게 송 대표의 설명이다.
“꽃잠은 스무 살 청춘 같아요. 발효 과정도 까다로워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술이에요. 반면 은가비는 잘 변하지 않습니다. 잘 익은 사오십대 어른 같은 느낌이죠.”
실제로 맛을 보니 그렇다. 같은 꽃잠인데 병마다 신맛의 정도는 미묘한 차이가 느껴진다. 한날한시에 빚어도 누룩 균에 따라 맛의 차이가 나는 단양주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은가비와 여여는 단맛이 중심인데, 꽃향과 과실향이 풍부하다.
2021년 선보인 ‘꽃잠더하기’(5도)는 꽃잠의 청량한 탄산을 더욱 키운 발포막걸리다. 사흘 안에 1차 발효를 한 뒤 30일 이상 후숙성하는 과정에서 천연탄산이 만들어지는데, 워낙 강력해 안전하게 개봉하는 방법을 동영상으로 안내할 정도다.
지리산옛술도가의 술은 함양의 식재료, 그중에서도 지리산 흑돼지와 궁합이 맞다. 양조장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마을의 초입에 있는 ‘강쇠네흑돼지’는 정육식당처럼 신선한 생고기로 유명하다. 주인장이 지리산 자락 농장에서 직접 키운 흑돼지를 내놓는다.
숯불 불판에 구운 흑돼지생삽겹살은 일반 삼겹살에 비해 훨씬 쫄깃하면서도 부드럽다. 신선한 쌈채소와 함께 한입 가득 먹은 뒤 꽃잠을 한 모금 들이켜면, 막걸리의 산미가 기름진 식감을 없애면서 침샘을 더욱 돋운다. 아쉽게도 식당에선 꽃잠막걸리를 판매하진 않지만, 양조장에서 술을 구매하고 식당에 미리 양해를 구하면 한두 병 정도는 곁들여도 무방하다.
올해 지리산옛술도가는 전통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계획을 세웠다. 업체에서 만든 누룩 대신 송 대표가 직접 디딘 누룩만 쓰는 것이다. 밀누룩·쌀누룩이 아닌 보리누룩으로 술을 빚는 실험도 하고 있다. 모두 어머니께 배운 옛 맛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다.
“요즘 다시 우리 술 붐이 일고 있는데 ‘전통주가 거기서 거기더라’는 얘기가 나올까 봐 걱정이에요. 양조장마다 자기 술의 특색을 잘 지켜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송 대표 부부의 꿈과 목표는 한결같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동영상=김보경 PD harufor@
-제품명 : 꽃잠막걸리
-양조장 : 지리산옛술도가(경남 함양군)
-내용량 : 1000mL
-알코올 : 6.0%
-원재료 : 쌀·누룩·정제수
[기자들의 시음평]
▶김희돈 스포츠라이프부 부장
“꽃향기 같은 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강한 향에 비해 맛은 라이트하다. 경쾌한 막걸리다.”
▶남형욱 디지털미디어부 기자
“탄산이 되게 부드럽다. 상큼한 맛인 데다 입에 남는 느낌도 덜해 가볍게 마실 수 있을 듯.”
▶이상배 디지털미디어부 기자
“‘청량하다’는 말로 요약된다. 탄산이 세지만 목 넘김이 강하진 없다. 산미도 과하지 않다.”
▶이지민 디지털미디어부 에디터
“여태껏 먹은 막걸리 중 탄산감이 제일 세 청량감이 있다. 상큼한 매실주를 마시는 느낌.”
[전문가의 맛 코멘트]
▶이지민 대동여주도 대표
“누룩의 컬러가 담겨 톤 다운된 베이지 색깔인데, 묽은 질감의 두유 같은 느낌도 든다. 잔을 가까이 하면 배 껍질에 코를 댄 듯한 시원한 향이 감돌며, 덜 익은 바나나·요구르트·치즈·곡물의 향이 두루 느껴진다. 맛에서는 그동안 변화가 조금 있었던 것 같다. 이전에 맛봤던 꽃잠이 톡 쏘는 산미가 특징이었다면, 요즘의 꽃잠은 단맛이 조금 생기고 산미가 줄어 순해진 느낌이다. 단맛이 존재를 비추더라도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강도는 가볍다. 맛의 특징을 찾고자 잔을 연거푸 마시게 되는데 후미에서 빠르게 맛이 정리된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