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60분’ PD가 ‘울지마 톤즈’를 찍은 이유… 이태석재단 구수환 이사장 [부산피디아 WHO(後)]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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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보도와 시사 고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추적 60분’을 들어봤을 것이다. ‘추적 60분’은 KBS에서 1983년부터 2019년까지 1000회 넘게 방영된 국내 최초이자 최장 탐사보도 프로그램이다. 구수환(65) 이태석재단 이사장은 ‘추적 60분’의 PD(프로듀서)이자 진행자로 활약했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부당함을 비판하는 것이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2010년, 구 이사장은 이태석 신부가 남수단에서 펼친 헌신적인 삶을 다룬 영화 ‘울지마 톤즈’를 찍는다. 회사를 그만둔 이후에도 이태석 신부가 남긴 사랑과 섬김의 메시지를 사회에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탐사보도 PD가 어쩌다 이태석 신부의 사랑을 말하게 된 것일까. 또, 그가 이태석 신부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태석재단 사무실에서 구수환 이사장을 만났다.


이태석재단 사무실에서 <부산일보>와 인터뷰 중인 구수환 이사장의 모습. 정수원·김보경 PD blueskyda2@busan.com 이태석재단 사무실에서 <부산일보>와 인터뷰 중인 구수환 이사장의 모습. 정수원·김보경 PD blueskyda2@busan.com

-탐사보도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추적 60분’ PD로 일했다.


처음부터 그 분야에서 일할 생각은 아니었다. 강원도 강릉 방송국에 발령받고 갔는데, 하루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찾아왔다. 임대주택에서 5년 동안 세를 내며 살면 자기 것이 된다는 말을 믿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그게 아니라는 말을 들은 거다. 행정기관 도움도 받지 못하고 소송도 해봤지만 재판에서도 지니까 마지막으로 방송국을 찾아왔다. 이분들이 눈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듣고 있자니 참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취재해서 방송이 나갔는데 다음날 출근하자 할아버지, 할머니가 시루떡과 과일을 가지고 왔다. 그러고는 나한테 연신 고마움을 전하더라. 저널리스트로서 사회적 약자에게 도움을 줬다는 게 무척 뿌듯했다. 그 뒤로는 자원해서 시사 고발 프로그램을 계속 만들었다. 협박은 물론 형사, 민사만 10번 넘게 당했으니, 아마 우리나라 PD 중에서 소송은 제가 제일 많이 당했을 거다.



-간판 시사 고발 프로그램의 PD가 어쩌다 이태석 신부님을 알게 되고,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찍게 된 건지?


사실 나는 이태석 신부님을 생전에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2010년, 인터넷에서 ‘수단의 슈바이처 선종’이라는 기사를 본 게 처음이었다. 그런데 ‘슈바이처’ ‘선종’이 아닌 ‘수단’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수단은 내전으로 고통받고 있는 아프리카 국가이지 않은가. 내가 종군 기자 생활을 한 5년 하며, 당시 같이 다니던 프랑스 기자가 총에 맞고 죽는 현장도 본 적 있다. 전쟁 현장이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니고 전쟁통인 수단에서 몸 바쳐 봉사한 사제가 있다고 하니 관심이 쏠렸다.


그런데 이태석 신부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분은 단순히 사제 자격으로 선교를 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분이 톤즈에서 보여준 헌신과 사랑, 섬김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이걸 다큐멘터리로 만들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신부님이 계셨던 ‘톤즈’에 가보니 정말 수많은 아이가 이태석 신부님의 선종 소식에 슬퍼하고 그리워하더라. 이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먼저 내보내게 됐고,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영화 ‘울지마 톤즈’까지 개봉하게 됐다.



-‘울지마 톤즈’는 44만 3000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역대 개봉 다큐멘터리 중 4번째로 흥행했다. 관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었는지?


사실 영화가 유명해지면서 걱정을 많이 했다. 내가 생전 신부님을 직접 뵌 게 아니기 때문에 ‘만에 하나 신부님의 의지를 잘못 해석했을 때 국민들이 느낄 혼란스러움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라는 고민이 들었다.


우선 대중에게 신부님의 정신을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신부 이태석보다는 인간 이태석의 삶을 조명하려고 했다. 영화를 보면 이태석 신부님이 사제복을 입은 장면이 딱 한 번 나온다. PD로서 의도한 장면이다. 사제로서의 모습보다 사람을 섬기고 사람에게 헌신하며 항상 밝은 모습을 잃지 않았던 신부님의 모습을 그대로 전달하려 했다.


또 다른 방법은 제가 직접 신부님처럼 살아본 거다. 신부님처럼 살려면 욕심이 없고 희생을 아까워하지 않으며, 사람을 대할 때 진심으로 다가가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보니 정말 행복하더라. ‘신부님처럼 살면 존경받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걸 관객에게 꼭 말해주고 싶었다.



-‘울지마 톤즈’ 이후 만드는 영상의 분위기가 바뀐 것 같다.


‘울지마 톤즈’를 본 많은 분이 영화를 보고 감동하며 펑펑 울더라. 처음에는 많이 당황했다. 그래서 ‘왜 웁니까’라고 물어보니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하나는 신부님의 삶을 보니 너무 이기적으로 살아왔던 자기 모습이 부끄럽다는 거다. 또 하나는 ‘저런 지도자가 우리 곁에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그리움의 감정이었다.


그걸 보며 깨달음을 얻었다. 바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고발은 사랑이었구나’라는 사실이다. 나는 십수 년 동안 시사 고발 프로그램을 만들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게 쉽지 않다. 그런데 신부님의 삶에 사람들이 반응하고 마음가짐을 바꾸는 걸 본 거다. 무엇보다 사랑이 우리 사회에 기쁨과 감동을 주는 역할을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울지마 톤즈’ 이후의 내 프로그램은 내용이 다 바뀌었다.


-현재 이태석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태석재단은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이태석재단은 설립하게 된 동기가 일반 NGO(비정부단체)하고 다르다. 2010년 ‘울지마 톤즈’가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내가 한국 정부에 ‘남수단 수도에 이태석 신부님의 이름을 딴 병원을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한국 정부, 남수단 정부, KBS 이렇게 세 곳이 1억 달러를 들여 ‘스마일 톤즈’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걸 국가에서 직접 할 수 없으니 만들어진 게 바로 이태석재단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병원 설립은 무산이 됐다. 그래도 이태석 신부님이 한 일을 이어가는 단체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왕 재단을 만들었으니 병원 설립 대신 역할을 바꾸게 된 거다.


재단은 제가 추진해서 만들었지만 초대 이사장은 이태석 신부님의 친형인 이태영 신부님께 부탁을 드렸다. 세 차례 정도 고사하셨는데, 사정사정해서 이사장으로 추대했다. 이태영 신부님은 2019년 암으로 선종하셨는데 나에게 재단을 이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셔서 오늘날까지 이사장을 맡게 됐다.



-이태석재단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재단이 하는 일은 딱 두 가지다. 하나는 남수단에서 신부님이 해오셨던 학교 설립과 한센인 마을 지원을 끊기지 않게 이어가는 것. 그래서 우리는 한세인 마을에 식량 원조도 하고, 이태석 신부님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 설립도 준비 중이다.


두 번째는 이태석 신부님의 제자들이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도 의사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이태석 신부님이 남기고 간 정신을 우리 사회에 알리는 거라 생각한다.. 올해는 이태석 리더십 아카데미라는 기구를 설립했다. 거기서는 리더십 학교, 저널리즘 학교, 인문 강연 이 세 가지를 학교나 일반인들 대상으로 운영할 예정이다. 이 세 가지 사업이 신부님의 삶을 우리 사회에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고 확신한다.


-이태석 신부 선종 10년 만인 2019년에 ‘울지마 톤즈’를 잇는 영화 ‘부활’을 개봉했다.


처음부터 후속 영화를 만들려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태영 신부님이 선종 전에 동생의 삶을 영상으로 정리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뭘 찍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신부님의 제자들이 생각났다.


그중 마틴이라는 제자가 에티오피아 약대를 졸업한다며 나에게 연락했다. 카메라 하나를 들고 그 친구를 축하하러 갔는데, 자기 형도 의사가 됐고, 의대를 다니는 친구도 있다고 말하더라. 처음에는 거짓말이라고 했다. 하루 끼니도 먹기 어려운 톤즈 상황을 내가 잘 아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싶었다.


근데 전화해 봤더니 진짜더라. 남수단에서 서울대 의대 같은 곳이 국립대 주바 의대다. 여기에 갔더니 열댓 명이 나와있었는데, 거기 아이 중 4명은 10년 전에 내가 인터뷰했던 애들이더라. 내가 깜짝 놀라서 ‘의대를 간 이유가 뭐냐’고 물어봤다. 이태석 신부님이 죽어가는 가족과 주민들을 땀을 뻘뻘 흘려가며 진료한 걸 보고 ‘나도 저렇게 좋은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하더라.


그럼 돈은 어떻게 했냐고 물으니 친척들을 찾아가서 십시일반 모아서 유학을 왔다고 했다. 그래도 돈이 없으니까 집에서 왕복 4시간을 걸어서 왔다 갔다 하며 학교에 다닌다더라.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존심 상할까 봐 악수하며 손에 100달러를 쥐여줬더니 눈물을 흘리며 ‘신부님처럼 살겠습니다’라고 하더라. 나도 모르게 ‘너희가 의대를 졸업할 때까지 내가 책임지겠다’고 내뱉어버렸다.


그리고 이 아이들에게 ‘이태석 신부님은 한센인에게도 아낌없이 사랑을 나누었는데 너희들도 그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했더니 한센인 마을로 가겠다고 했다. 그곳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했는데, 환자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이태석 신부님이 돌아오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더라. 제자들도 똑같이 답했다. ‘진료 내내 이태석 신부님이 옆에 계셨습니다’라고 하더라. 그때 생각했다. 아, 이것이 진정한 부활이구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이태석 신부님의 사랑과 정신의 부활. 그래서 영화 제목도 ‘부활’로 짓게 됐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이태석 신부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태석 신부님은 우리에게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경청하는 지도자, 진심으로 대하는 지도자, 욕심이 없는 지도자, 공감 능력이 뛰어난 지도,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는 지도자다. 우리 사회는 빈부격차, 지역·세대 갈등 같은 수많은 위기를 겪고 있다. 국민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지도자를 원한다.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이태석 신부님에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이태석 신부님은 우리 개개인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비법을 남기고 가셨다. 바로 봉사와 나눔이다.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를 보면 ‘봉사’가 무엇인지 나온다. 거기에는 ‘나보다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심이 없이 도와주는 것’이라고 돼 있다. 그런데 나는 생각이 다르다. 봉사라는 것은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굉장히 사회에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걸 느끼는 거다.


내가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면 자존감이 높아진다. 그러면 삶이 행복하니까 얼굴이 밝아질 거 아닌가. 밝아지면 내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보통 아이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건 사회를 움직일 힘을 가지고 사람들을 이끌게 하기 위함이 아닌가. 그런데 신부님처럼 봉사와 나눔의 삶을 살면 사람들이 더 많이 이렇게 몰려든다는 것이다.


이태석 신부님은 존경받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교과서 같은 분이다. 이분이 남긴 정신은 우리 삶을 풍요롭고 가치 있게 만드는 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모두 봉사와 나눔의 삶을 생활화했으면 좋겠다. 이태석재단도 신부님이 보여준 정신과 리더십을 우리 사회에 전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이상배·남형욱 기자 sangbae@busan.com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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