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주말] 기이한 ‘보 이즈 어프레이드’와 지루한 ‘플래닛’
‘조커’가 ‘루저’로 돌아왔습니다. 스타 배우 호아킨 피닉스 주연의 ‘보 이즈 어프레이드’가 지난 5일 개봉했습니다. 마마보이 ‘보’의 기이한 여정을 다룬 이 영화는 천재 공포영화 감독 반열에 오른 아리 에스터 감독의 신작입니다. 영화 평론가와 감독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려 ‘평범한 관객의 눈’으로 직접 관람한 후기를 전합니다.
반대로 같은 날 개봉한 ‘플래닛’은 참고할 만한 평가조차 찾기 힘듭니다. 그러나 기자를 비롯한 재난 영화 매니아들에게 ‘플래닛’은 기대작입니다. 상영을 앞두고 유튜브에 공개된 예고편은 26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했고, 화려한 예고편에 기대감을 내비치는 댓글도 이어졌습니다. 망설이는 영화 팬들을 위해 ‘선발대’로 극장을 찾아봤습니다.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와 ‘플래닛’. 싸이더스·올스타엔터테인먼트 제공
기괴한 루저 체험시키는 ‘보 이즈 어프레이드’
“어머니가 죽길 바란 적 있어요?”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 예고편 대사를 보고 이 영화가 심상찮은 작품이란 걸 직감했습니다. 공포영화 ‘유전’(2018)과 ‘미드소마’(2019)로 이름을 알린 미국 감독 아리 에스터의 신작은 기괴하고 음울하면서도 신선하고 논쟁적입니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편집증 환자인 주인공 ‘보’(호아킨 피닉스)가 그를 집착적으로 사랑하는 어머니 ‘모나’(패티 루폰)를 만나러 가는 여정에서 겪게 되는 기이한 환상과 공포를 그린 영화입니다.
보는 어린 시절 강압적인 어머니 손에 자라면서 심리적 불안 상태에 빠졌습니다. 머리가 희끗한 중년이 됐지만, 중요한 결정은 어머니에게 내맡기는 ‘마마보이’입니다. 일종의 가스라이팅 피해자인 그는 온갖 초현실적 시련을 겪으면서도 어머니를 보러 가야만 합니다.
이후 이야기는 보의 복잡하고 어두운 심리를 따라가면서 진행되는데, 망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그의 시선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돈키호테’를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괴상한 인물과 비현실적 사건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탓에 불쾌하고 기괴한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아들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그런 어머니에 대한 애증으로 괴로워하는 보의 심리를 시각화한 연출은 호러 영화의 그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러한 기이한 심리 묘사는 에스터 감독의 심연 덕에 탄생했습니다. 그는 영화에 대해 “나의 개성과 유머가 고스란히 담긴 가장 나다운 작품”이라며 “보가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고 그 사이에서 계속 갈등하는 부분이나 그가 가진 죄책감이 나와 닮았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지금까지 만든 작품 중에 가장 자기 검열을 적게 했다”며 “자연스럽게, 본능적으로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 싸이더스 제공
어머니를 공포의 근원으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선 “가족은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요새라고 생각한다”며 “가족의 좋은 면을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좀 지루할 것 같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에스터 감독의 말대로 영화는 아주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보의 불안한 정신세계가 시도 때도 없이 갈등과 마찰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보를 괴롭히는 괴인들의 괴행으로 졸음이 달아나고 식욕이 떨어질 지경입니다. 여기에 불친절한 유머와 난해하기 짝이 없는 메타포가 넘쳐나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에스터 감독은 그리스 비극, 구약 성서, 프로이트 사상 등 다양한 곳에서 얻은 영감을 영화에 녹여냈다고 합니다. 남성성을 상징하는 남근, 트라우마를 상징하는 물을 비롯한 각종 은유가 기발하지만, 관객에 따라 고약한 경험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에스터 감독은 영화 비하인드 홍보 영상에서 관객이 ‘루저’가 된 체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기자는 원치 않는 ‘루저 체험’을 해야 했는데, 찌질하고 억압된 캐릭터인 보를 완벽하게 소화한 호아킨 피닉스의 열연이 큰 몫을 했습니다. 영화 ‘조커’(2019)에서 인생 캐릭터를 연기한 그는 이번 작품에서 자기 주관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공허한 눈빛 연기를 선보입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도심을 내달리는가 하면, 아이처럼 울거나 세상을 잃은 듯 절규합니다. 배역을 위해 완전히 망가진 모습을 드러내는 그에게 존경심이 들 지경이었습니다.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 싸이더스 제공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깔끔한 기승전결을 선호하는 대다수 한국 관객은 좋아하지 않을 영화입니다. CGV 실관람객 만족도를 나타내는 ‘골든에그’ 지수는 7일 오전 현재 78%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심오하고 뒤틀린 인간 내면 묘사에 익숙한 일부 시네필 사이에선 호평이 나옵니다. 실관람평을 추천순으로 정렬해보니 “시간 가는 줄 알고 봤습니다”라는 혹평과 “아리 에스터 최고의 역작”이라는 호평이 엇갈립니다.
지난 4월 미국 뉴욕서 열린 깜짝 상영회에서 사회를 맡았던 배우 엠마 스톤의 반응이 재밌습니다. 그는 에스터 감독에게 “지금 제정신이에요?”(Are you okay?)라는 농담을 건네면서도 ‘걸작’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엠마 스톤 역시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영화가 난해하다는 평가에 대한 에스터 감독의 답은 이렇습니다. 지난달 서울서 열린 시사회에서 “영화가 관객에게 어려울 것 같다”는 한 기자의 의견에 그는 “제 입장에서는 영화가 단순하다고 생각한다”며 “이번 영화를 한 줄로 말하면,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습니다.
사실 기자는 호러나 선정적 요소를 선호하지 않아 이 영화를 두 번 이상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극찬하고, 봉준호 감독은 벌써 두 번이나 봤다고 하니, 천재끼리만 통하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입니다.
영화 ‘플래닛’. 올스타엔터테인먼트 제공
전형적인 러시아 블록버스터 ‘플래닛’…아쉬운 ‘용두사미’
러시아 우주정거장 ‘미르’에서 근무하는 ‘아라보프’(아나톨리 벨리)와 동료들은 24시간 뒤 소행성이 지구에 추락할 가능성을 발견하지만, 본부는 확률이 희박하다는 이유로 보고를 무시합니다. 그러나 우려가 현실이 돼 소행성 뒤쪽 사각 지대의 운석 파편들이 우주정거장과 지구를 덮치며 재앙이 시작됩니다.
드미트리 키셀레프 감독이 연출한 ‘플래닛’은 지난해 12월 ‘미라’(MIRA)라는 제목으로 러시아에서 개봉했던 재난영화입니다. 예고편을 보면 컴퓨터그래픽(CG)만 앞세운 전형적인 러시아식 SF블록버스터로 보입니다. 국내 평가가 드물어 해외 영화 사이트인 IMDB에서 리뷰를 보던 중 “할리우드와 한국에서 개봉된 대부분의 작품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흥미진진하다“는 한 해외 누리꾼의 평가에 이끌려 극장에서 관람했습니다.
영화는 초반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소행성 파편들이 쏟아져 건물과 도로 등 주요 제반시설이 파괴되는 블라디보스토크의 혼란을 현실감 있게 그렸습니다. 아라보프의 딸 ‘레라’(베로니카 우스티모바)가 아파트에서 탈출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핸드헬드 카메라는 현장감을 극대화시킵니다. 시점은 조금 다르지만 영화 ‘클로버필드’(2008)를 연상시키는 연출입니다. 운석 충돌로 인한 충격파를 시각효과를 통해 사실적으로 구현해 여타 재난영화에서 쉽게 보지 못했던 장면을 보여줍니다.
열다섯 소녀 레라는 치고받는 자동차들과 무너져 내리는 건물들을 뚫고 사력을 다해 탈출하지만, 대피한 건물이 붕괴돼 잔해에 매몰되고 맙니다. 같은 시각 우주정거장에서 홀로 살아남은 아빠 아라보프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라보프는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딸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영화 ‘이글아이’(2008)처럼 CCTV부터 IP카메라, 신호등까지 모든 통신 장치를 제어할 수 있는 장비와 우주정거장 인공지능(AI) ‘미라’를 활용해 딸의 탈출을 돕습니다.
영화 ‘플래닛’. 올스타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는 사실 SF 장르임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비과학적이라 몰입이 쉽지 않습니다. 우주정거장에 갇힌 우주비행사 아라보프가 지구의 모든 통신장비를 제멋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설정부터 억지스럽습니다. 레라에게 길을 안내하기 위해 신호등은 물론 가게 간판까지 켜는 전지전능한 모습에서 현실감이 사라집니다. 애초에 작은 소행성 파편들이 대기권을 통과하면서도 불에 타지 않고 지표면과 충돌한다는 설정 자체가 비과학적입니다.
현실성을 차치해도 아쉬움은 남습니다. 주인공 레라의 행동에 개연성이 결여된 탓입니다. 학교에서 유능한 달리기 선수로 활동하는 레라는 감정 표현이 서툴고 내성적입니다. 어린 시절 겪은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와 부모님의 이혼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복 남동생 ‘예고르’(알렉산더 페트로프)에게 소중한 물건도 내어주는 따뜻한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관객 입장에서 레라는 재난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고구마’ 캐릭터입니다.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는 상황에서 남동생 예고르를 구해야 한다는 이유로, 유조선 폭발을 막겠다는 이유로 위험한 현장에 직접 뛰어듭니다. 그러나 그 결심이 자연스럽다기보다는 극의 전개를 위한 억지에 가깝게 느껴지는게 문제입니다.
아버지 아라보프도 감정을 이입하기 어려운 캐릭터입니다. 아라보프는 레라가 어린 시절 화상을 입게 된 사고 당시 딸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영화는 그런 아라보프의 심정이 전해지도록 과거를 회상하는 플래시백을 적극 활용하는데, 과장된 감정 연기와 사고 장면 묘사가 극의 흐름을 방해합니다. 러시아 영화식 슬로우 효과는 진부하고 올드합니다.
영화 종반부에는 가족애를 강조한 신파가 등장해 더욱 몰입을 해칩니다. 감독은 “여기서 울어야 합니다”라고 외치지만, 눈물이 한 방울도 나지 않았습니다. 감정을 끌어올리려 노래를 이용한 대목에서 2000년대 한국 영화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실관람평들을 살펴보니 한 관객도 “마지막은 한국영화인줄”이라는 평가를 남겼네요.
시각효과와 스케일을 앞세운 재난·SF 영화들은 흔히 ‘예고편이 전부’라는 평가를 듣곤 합니다. ‘플래닛’ 역시 예고편에서 기대감을 모았던 극 초반의 운석 충돌 시퀀스를 제외하면, 여타 러시아 블록버스터 영화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참, ‘플래닛’ 예고편에선 영어로 대사를 소화하지만, 실제 극장에서는 러시아어만 들립니다. 전범국가 러시아에 대한 관객의 거부감을 덜어내기 위해 영어로 더빙을 하는 수고를 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