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극한 호우와 뻔뻔함
이현우 신문센터장
기후변화로 갈수록 사나워지는 기상
세상 삼킬 듯 퍼붓는 ‘극한 호우’ 시대
극단 치닫는 기상 현상에도 ‘태연’
지하차도 참사 되풀이에도 대응책 없어
비상사태에서 드러나는 지도자의 무능
그들이 나태하면 국민 목숨 위태로워져
오전 7시. 폭우가 쏟아지는 한여름 출근길이었다. 바로 눈앞 교차로에 물이 점점 차올랐다. 순식간에 승용차 바퀴까지 물이 찰랑거렸다. 하수구에서 거꾸로 솟아오르는 빗물이 승용차 엔진 룸을 덮칠 것 같았다. 숨을 고르며 차를 살살 몰아 겨우 침수 구간을 빠져 나왔다. 아찔함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신문사로 출근하니 곳곳에 물난리가 났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시내버스가 물에 잠겨 멈춰선 모습의 사진이 편집국에 전송됐다. 기습 폭우에 물바다로 변해버린 부산 남구 한 도로. 20여 분 전 승용차를 몰고 가까스로 빠져나온 그 현장이었다.
10여 년 전의 경험이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최근 장맛비 속에 있다 보니 문득 10여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요즘 비는 그때보다 한층 더 사납다. 굵은 물줄기를 뿌리며 우르릉 쿵쾅 으르렁거린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퍼붓는 호우 속에선 어떤 돌발 상황이 닥쳐도 이상하지 않다 싶다. ‘극한 호우’라는 표현이 딱 맞다. 기후변화로 사나워지는 비는 갈수록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장마철 내내 내리는 양보다 많은 비가 더 짧은 기간에 몰아치기도 한다. 올해 장마 기간이 3분의 2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평년 장마철 전체 강우량을 뛰어넘었다. 기상 현상이 극단적으로 치닫는데도 우리는 너무 태연한 듯하다. 부산 동구 초량동 제1지하차도에 들이닥친 빗물이 운전자 3명의 목숨을 앗아가도 국가 차원의 반성은 없었다. 그러다 3년 후 더 큰 지하차도 참사로 다시 14명이 희생되는 사태를 맞는다. 기상 이변이 보편적 기상으로 고착화되고 있는 만큼 대비 태세를 당장 뜯어고쳐야 마땅하다. 미국은 2006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후 국가 방재 시스템을 전면 수정했다. 국토안보부 산하에 있던 연방재난관리청(FEMA)을 연방 정부 독립 기관으로 재편했다. 어마어마한 폭풍우에 1800여 명이 귀중한 목숨을 빼앗긴 이후의 수습책이다. 14명의 안타까운 희생도 헛되이 날려선 안 된다. 지금의 재난 대응 시스템으로는 변화무쌍한 기후변화 현상에 적절히 대응하기 어렵다는 게 증명된다. 이에 여야 정치권이 총리 직속 민관합동기구 신설, 재난예방 패키지법 등을 추진하고 나섰다. 극한 호우 앞에 먹통이 된 재난 대응 시스템을 서둘러 뜯어고쳐 억울한 국민 희생을 막을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극한 호우만큼이나 감당하기 힘든 게 또 있다. 비상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지도자와 공직자들의 뻔뻔함과 무능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하는 고통이다. 충북 청주시 오송읍 궁평2지하차도 사고는 허술하고 오만한 대응이 낳은 참사로 결론 나고 있다. 20차례 이상 이어진 신고와 경고 속에서도 재난 담당 공무원들은 뒤로 나자빠져 있었다. 해당 지자체와 경찰은 신고를 묵살한 채 출동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제대로 반성하는 이가 없다. 김영환 충북도지사와 이범석 청주시장은 사고 직후 제대로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사고 닷새 이상 지나 뒤늦게 내놓은 사과에도 지하차도 참사 등을 제대로 언급하지 않아 뭇매를 맞고 있다. 사고 희생자 유가족과 시민단체들은 김 지사와 이 시장을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홍준표 대구시장의 뻔뻔함도 도를 한참 넘은 듯하다. 오송 지하차도 사고가 난 지난 15일 대구에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골프를 쳐도 문제없다는 인식은 몰상식 그 자체다. 당시 홍 시장은 “주말에 골프를 치면 안 된다는 규정이 어디 있느냐” “공직자들의 주말은 비상근무 외에는 자유” 따위의 궁색한 변명을 내놓았다. 홍 시장은 최근 대구시 엠지(MZ) 세대 공무원 간담회에서 주 4일제 근무 도입과 관련한 질문에 “퇴직하라”고 했다. 그는 “쉴 거 다 쉬는 공무원이 어디 있나”고 했다. 그러다 자신에 대해선 “주말에 골프를 치면 안 된다는 규정이 어디 있느냐”고 스스로 면죄부를 줬다. 참 편한 논리다. 지난 15일 대구시에는 공무원 비상근무 제2호가 발령돼 전 직원 20%가 비상 근무 중이었다. 홍 시장이 소속된 정당 국민의힘 윤리규칙 제22조는 ‘자연재해나 대형 사건사고 등으로 국민이 슬픔에 잠겨 있거나 국민과 국가가 힘을 모아야 할 경우에는 경위를 막론하고 오락성 행사나 유흥·골프 등 국민 정서에 반하는 행위를 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들끓는 민심에 홍 시장은 마지못한 듯 사과했고, 국민의힘 윤리위원회는 징계 절차에 들어갔다. 징계 수위는 경고, 당원권 정지, 탈당 권고, 제명 순으로 높아진다. 국힘 윤리위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충북 지자체장들의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 수사가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될지에도 시선이 집중된다. 명심해야 할 건 그들이 게을렀던 그 순간 50명에 가까운 우리 국민이 물난리와 산사태 등으로 한꺼번에 귀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이현우 기자 hoor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