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함께 건강한 여름 나기…중앙동 40계단 발효소 '복분자 약주' [술도락 맛홀릭] <15>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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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도락 맛홀릭] <15> 40계단 발효소 '꽃빛' '마주향해'

40계단 발효소의 대표 술 '꽃빛'(왼쪽)과 '마주향해'. 복분자 열매가 들어가는 약주여서 색과 향미가 포도주와 흡사하다. 40계단 발효소의 대표 술 '꽃빛'(왼쪽)과 '마주향해'. 복분자 열매가 들어가는 약주여서 색과 향미가 포도주와 흡사하다.

가가호호 술을 빚던 시절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던 가양주(家釀酒) 문화가 100년 만에 다시 부활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급된 지역특산주 면허만 1400건에 이르고, 해마다 새로운 양조장과 전통주가 탄생한다.

전통주엔 지역의 특색이 오롯이 담겼다. 지역에서 나는 재료로 술을 빚어, 특산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부산일보>는 ‘술도락 맛홀릭’ 기획시리즈를 통해 부산·울산·경남 지역의 전통주 양조장을 탐방하고, 지역의 맛과 가치를 재조명한다. 이지민 대동여주도 대표 등 전통주 전문가도 힘을 보탠다.

한여름 무더위는 전통주도 견디기 어렵다. 고온 탓에 술이 쉬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런데 여름이 제철인 우리 술이 있다. ‘과하주(過夏酒)’, 이름 그대로 ‘여름이 지나도록 맛이 안 변하고, 여름에 마셔 건강하게 더위를 이겨 내는 술’이다. 부산 원도심에는 과하주를 빚는 작은 양조장이 있다. 복분자를 넣어 빛깔과 향미까지 특색 있다. 싱그러운 과실 향과 술 익는 내음이 있는 골목을 찾아 나섰다.

■ 40계단 역사 품은 신생 양조장

한국전쟁 피란민의 아픔이 서린 곳, 중구 중앙동 40계단 앞에서 인쇄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몇 걸음 지나지 않아 작은 상가 건물의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40계단 발효소’.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3층까지 오르는 좁고 가파른 계단이 건물의 오랜 역사를 말해 준다. 조심조심 한 계단씩 올라 회색 철문을 열자 바깥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밝고 아늑한 공간이 펼쳐진다.

“고향이 영도여서 중앙동은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동네였어요. 양조장을 차릴 땐 코로나 이전이라 관광객도 많았고, 술과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모이지 않을까 생각했죠.”

취재진을 맞은 조부영(51) 대표는 꾸밈없는 말투로 양조장을 소개했다. 주인장을 닮아 공간은 소박하고 설비도 단출하다. 전체 60㎡에 제조실과 발효실, 저온숙성실이 오밀오밀 자리한다. 햇살이 잘 드는 창가 쪽에 보랏빛 술병이 전시돼 있다. 40계단 발효소의 대표술인 ‘꽃빛’과 ‘마주향해’다. 보라색은 복분자의 빛깔이다. 꽃빛은 세 번 빚은 삼양주, 마주향해는 이양주에 증류주를 더한 과하주다. 복분자를 넣어 만든 과하주는 마주향해가 전국에서 유일하다.

부산 중구 중앙동 40계단 앞에서 오른쪽 인쇄골목으로 접어들면 한 상가 건물 3층에 내걸린 '40계단 양조장'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부산 중구 중앙동 40계단 앞에서 오른쪽 인쇄골목으로 접어들면 한 상가 건물 3층에 내걸린 '40계단 양조장'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40계단보다는 적지만, 건물 3층 양조장에 다다르려면 까마득한 계단을 올라야 한다. 40계단보다는 적지만, 건물 3층 양조장에 다다르려면 까마득한 계단을 올라야 한다.
40계단 발효소 조부영 대표가 술 거르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원통 아래 광목천을 깔고 원주를 부은 뒤 무거운 돌을 올려 두면 중력에 의해 지게미가 걸러진다. 40계단 발효소 조부영 대표가 술 거르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원통 아래 광목천을 깔고 원주를 부은 뒤 무거운 돌을 올려 두면 중력에 의해 지게미가 걸러진다.

40계단 발효소는 조 대표 홀로 운영하는 1인 양조장이다. 한 달에 생산하는 술은 200병 남짓. 소규모 양조장이어서 인터넷 판매도 안 된다. 하지만 입소문을 타고 부산·경남지역은 물론 서울을 비롯해 수도권 등지에서 오는 방문객이 꾸준하다.

술과 양조장의 인지도와 달리 조 대표의 경력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4년 전 여름, 남편이 덜컥 벌인 일이 그를 전통주 세계로 이끌었다.

“2019년 봄부터 지인을 따라 미리내우리술공방에서 술을 몇 번 빚었어요. 소금도 만들 수 있다길래, 복분자주를 빚은 뒤 남은 지게미로 만들어 봤죠. 그런데 남편이 소금 아이템으로 부산창조경제혁신센터 예비창업 프로그램에 신청을 한 거예요.”

예상과 달리 최종 선정되면서 일이 커져 버렸다. 소금의 원료인 술지게미는 사고파는 식재료가 아니라, 지게미를 얻기 위해 결국 양조장까지 차리게 됐다.

전업주부에서 양조장 대표가 됐지만 조 대표의 전통주 경험은 앞서 술공방에서 빚어 본 세 번이 전부였다. 조 대표는 미리내우리술공방 손승희 대표의 도움을 받아 부랴부랴 복분자 약주 레시피의 기본 틀을 완성하고 술 빚기에 몰두했다. 2020년 2월 소규모 양조장 면허를 내고 추석에 맞춰 첫 제품 ‘꽃빛’과 ‘꽃빛소금’을 내놓기까지, 단 1년 동안 벌어진 일이다.

40계단 발효소의 제조실. 1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양조장인 만큼 넓이도 설비도 단출하다. 40계단 발효소의 제조실. 1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양조장인 만큼 넓이도 설비도 단출하다.
조 대표가 혼자 술을 빚을 때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장비라며 소개한 플라스틱 의자와 빨래집게. 조 대표가 혼자 술을 빚을 때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장비라며 소개한 플라스틱 의자와 빨래집게.

■ 같지만 다른 복분자 약주·과하주

“너무 갑작스럽게 양조장을 열다 보니 한동안 밤잠을 설쳤어요. 주변에선 왜 홍보를 안 하냐고 그러는데, 술이 안 팔리는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였어요. 술맛이 안정화되기 전까진 오히려 많이 팔릴까 봐 무서웠죠.” 판매보다 술맛을 우선하는 조 대표의 초심은 지금도 한결같다.

‘꽃빛’은 이름부터 눈길이 간다. 복분자에 함유된 항산화 물질 ‘안토시아닌’의 라틴어 뜻을 우리 말로 푼 것이다. 술공방에서 우연히 만난 대학 선배이자 술 빚기 선배인 <부산일보> 김승일 기자의 작명이다.

꽃빛을 유리잔에 따라 빛깔만 보면 와인과 분간이 안 될 정도다. 한 모금 들이켜자 여느 복분자주처럼 너무 달지도 끈적거리지도 않는다. 담금주에다 복분자 열매와 설탕을 넣은 과실주가 아니라, 쌀로 빚은 약주에 복분자를 가미했기 때문이다. 누룩취를 줄이려고 전통누룩과 백국을 섞어 쓰고, 삼양주라 다른 복분자 약주와 비교해도 단맛이 덜하다는 게 조 대표의 설명이다.

40계단 발효소의 발효실. 항온시설을 갖춰 항상 20도 안팎을 유지한다. 40계단 발효소의 발효실. 항온시설을 갖춰 항상 20도 안팎을 유지한다.
과하주인 '마주향해'에 사용하는 증류주. 조 대표가 직접 쌀술을 빚어 증류하는데, 알코올 도수가 50도 정도다. 과하주인 '마주향해'에 사용하는 증류주. 조 대표가 직접 쌀술을 빚어 증류하는데, 알코올 도수가 50도 정도다.

세 번의 술 빚기 중 먼저 멥쌀 죽으로 밑술을 만든다. 그 다음 찹쌀 죽으로 첫 번째 덧술, 찹쌀 고두밥과 복분자로 두 번째 덧술을 한다. 복분자는 전북 고창군에서 따자마자 급속냉동한 열매를 쓴다. 8~9주 충분히 발효를 시키고 광목천으로 거른 뒤 저온숙성고에서 2달 더 숙성을 한다. 한 병이 나오기까지 넉 달가량 기다리는 셈이다. 침전물은 필터를 쓰지 않고 긴 숙성 과정에서 가라앉힌다. 이후 맑은 부분만 떠내 병에 담는다. 기계·필터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술 빛깔이 탁하지 않은 이유다.

조 대표는 지난해 설을 맞아 2가지 술(이양주)을 더 내놨다. 과하주 ‘마주향해’와 복분자를 뺀 약주 ‘은빛’이다. “술을 계속 빚어 보니 누룩을 많이 쓴다고 누룩취가 나는 게 아니더라고요. 전통누룩만 사용해 단맛과 산미가 좀 더 조화를 이룬 술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증류주가 들어가는 과하주 ‘마주향해’는 약주 중에서도 고급이다. 복분자와 함께 덧술을 한 뒤 발효 후반부에 조 대표가 직접 만든 ‘증류주’를 가미한다. 서로 다른 약주와 증류주가 만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는 의미가 술 이름에 담겼다.

꽃빛과 마주향해는 같은 복분자 약주 계열이라 빛깔로는 구분이 쉽지 않다. 알코올 도수도 똑같이 17도다. 그래도 오감에 집중해 시음을 하면 향미의 차이가 느껴진다. 마주향해의 복분자 향이 더 분명하고, 뒷맛에서 증류주의 알코올 기운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꽃빛'과 '마주향해'를 빚을 때 덧술에 들어가는 고두밥과 복분자 열매. 40계단 발효소 제공 '꽃빛'과 '마주향해'를 빚을 때 덧술에 들어가는 고두밥과 복분자 열매. 40계단 발효소 제공
복분자 약주는 빛깔만 보면 와인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40계단 발효소 제공 복분자 약주는 빛깔만 보면 와인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40계단 발효소 제공

■ 40계단서 하산하는 그날…

40계단 발효소는 자체 술 말고도 인근 비건 레스토랑 ‘아르프’에 전용 술을 납품한다. 계절별로 영도 녹차, 배·라임, 향신료 등이 들어간 약주다. 지역 음식점과 작은 양조장의 협업은 새로운 사업 모델로 업계 관심을 받고 있다.

40계단 발효소의 술은 양조장과 일부 보틀숍·전통주점에서만 만날 수 있어 귀하다. 양조장 근처에 술과 곁들일 만한 음식점이 여럿이어서 이왕이면 직접 방문할 만하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30여 년 역사의 ‘석기시대’는 오향장육이 대표 메뉴다. 그날그날 삶아 내놓는 고기는 부드럽고, 고기 위에 얹은 오이·양파·고추와 새콤한 양념이 시원함을 더한다. 양조장에서 두 블록 떨어진 중국음식점 ‘홍문’의 고추잡채는 겨울철 따뜻하게 즐길 만하다. 두 음식 모두 꽃빛 혹은 마주향해의 깔끔한 산미와 잘 어울린다.

40계단 발효소에서 빚어내는 술 3종 ‘꽃빛·은빛·마주향해’.(왼쪽부터) 40계단 발효소에서 빚어내는 술 3종 ‘꽃빛·은빛·마주향해’.(왼쪽부터)
중앙동 노포 '석기시대' 오향장육. 산미가 있는 40계단 발효소의 술과 잘 어울린다. 중앙동 노포 '석기시대' 오향장육. 산미가 있는 40계단 발효소의 술과 잘 어울린다.

햇수로 4년. 40계단 발효소는 문을 열자마자 코로나 팬데믹을 만났지만 묵묵히 버텨 온 끝에 업계에선 술 잘 만드는 양조장으로 자리매김하는 중이다.

“남들이 다 말릴 때 남편만 응원을 해 줬어요. 일단 2년만 버텨 보자고 했거든요. 힘 쓰는 일이나 각종 행정 업무를 남편이 도맡아서 도와준 덕분에 저는 술 빚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이젠 저보고 ‘(3층에서 1층으로)하산할 준비 됐냐’고 해요. 하하.”

부부의 바람대로 40계단 발효소의 다음 단계는 1층에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복합문화공간을 만들어 술을 매개로 사람들과의 접점을 넓혀 나가겠다는 구상이다.

“다양한 사람, 다양한 분야와 연결될 수 있다는 게 술의 장점인 것 같아요. 새 공간을 마련해 저희 술에 대해 제대로 설명도 드리고, 각계각층 사람들이 술을 매개로 음식·문학·음악 등 다양한 주제로 교류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해 보고 싶습니다.” 40계단에서 ‘하산’하는 그날이 기다려진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제품명 : 꽃빛

-양조장 : 40계단 발효소(부산 중구)

-내용량 : 500mL

-알코올 : 17.0%

-원재료 : 정제수·쌀·복분자·누룩·효모·입국

-제품명 : 마주향해

-양조장 : 40계단 발효소(부산 중구)

-내용량 : 375mL

-알코올 : 17.0%

-원재료 : 정제수·쌀·복분자·누룩·증류소주


[기자들의 시음평]

▶김희돈 스포츠라이프부 부장

-꽃빛

"일단 맛있다. 복분자가 들어가서인지 보통 풀내음이 연상되는 일반적인 약주와 달라 신기하다."

-마주향해

"복분자 재료의 특성을 증류주가 더 돋보이게 해 주는 것 같다. 향도 풍부하고 술 먹는 기분이 난다."

▶이상배 디지털미디어부 기자

-꽃빛

"약주와 복분자의 장점을 잘 블렌딩한 느낌. 상큼한 복분자가 약주의 묵직함을 훌륭히 완화시킨다."

-마주향해

"약주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묵직한 단맛. 술 본연의 향이 느껴진다. 치즈·크래커류와 잘 어울릴 듯."

▶김동우 편집파트 기자

-꽃빛

"복분자의 상큼함이 입맛을 돋운다. 과일주처럼 가볍지 않고 알코올 향이 술 정체성을 지켜 준다."

-마주향해

"산미가 혀끝과 입안에서 전체적으로 오래 감돈다. 느끼함을 잡아 줘 기름진 육류와 어울릴 것 같다."

▶이지민 디지털미디어부 에디터

-꽃빛

"포도주 마시는 느낌이라 알코올 도수가 17도 정도로 센 줄 모르겠다. 가볍게 즐기기 좋은 약주다."

-마주향해

"꽃빛보다 더 새콤하고 알코올 향도 더 많이 느껴진다. 꽃빛이 와인이라면 마주향해는 진짜 술이다."

[전문가의 맛 코멘트]

▶이지민 대동여주도 대표

-꽃빛

"잘 익은 검붉은 과실의 짙은 컬러가 느껴진다. 외관상으로는 와인 같은 느낌을 물씬 전한다. 코를 갖다 대니 싱그러운 복분자 향과 함께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다가온다. 한 잔 머금으면 부드럽게 넘어가는 느낌에서 좋은 첫인상을 받고, 뒤이어 느껴지는 아주 적절한 단맛에 기분 좋게 잔을 비우게 된다. 밸런스가 정말 좋은 복분자 약주이며, 시중의 복분자주 강한 단맛이 싫은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이 정도 퀄리티면 여름에 쟁여 놓고 초복·중복·말복을 장어와 함께해도 좋겠단 생각이 든다. 잘 만든 복분자 약주를 만나서 기쁘다. 부드럽고 우아한 여운에 빠져들게 된다."

-마주향해

"컬러와 향의 결은 꽃빛과 비슷한 듯하지만 향에서 스파이시함과 담백함이 더해진 게 느껴진다. 스월링(술 따른 잔을 둥글게 돌리는 행동) 할 때마다 코를 찌르는 알코올감도 있다. 꽃빛보다는 덜 달고, 뒤로 갈수록 부드러운 단맛에 은근한 산미와 스파이시한 맛이 느껴진다. 후미가 깔끔하게 정리되는 느낌이라 애주가들을 타깃으로 탄생한 복분자 과하주라 하겠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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