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민들레꽃 / 조지훈(1920~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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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 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 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잊어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 시집 〈풀잎단장〉(1952) 중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은 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에서는 꽃향기가 난다. 그런 사랑의 사람이 부재하게 될 때, 외로움은 존재론적 고독이 된다. 천지가 공허한 심연이 된다. 그래서 시인 조지훈은 잃어버린 사랑을, 꽃과 같기만 했던 사랑의 실체를 ‘민들레꽃’으로 소환한다. 현신(現身)해서야 겨우 풀리는 가슴의 멍울!

‘사랑한다는 말 이 한 마디’는 화자가 생전에 하지 못했던 말일 것이다. 그 말은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미처 해주지 못했던 말일 터이다. 그런 점에서 ‘민들레꽃’은 때늦은 회한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의 흔들림이다. 서로 마음의 상처에 ‘위로’가 될 수 있게 ‘맑은 눈을 들어 지켜보자’는 약속의 증표다. ‘아득한 거리’를 넘어 찾아올 수 있는 사랑이야말로 이런 신비를 재현할 수 있다.

김경복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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