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반달살이 2] 368곳의 오름, 놀멍쉬멍 오르다 보니 “오오~”
분화구·해변·숲 등 오름마다 제각각 매력
세계자연유산 거문오름은 사전 예약 필수
오래 머물다 보니 수시로 오르는 재미도
제주 반달살이 두 번째 이야기. 오래 머물러야 가능한 테마 여행을 생각하다 한라산이 뇌리에 스쳤다. 남한 최고봉인데 등산 초보엔 무리가 아닐까. 우려가 일자 낮은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제주도에 무려 368개나 있다는 오름이다. 오름은 ‘산’의 제주 방언. 알고 보면 한라산도 오름이다. 하루에 하나씩 올라도 1년이 넘게 걸리는 제주 오름. 그래도 좋다. 일단 이번 목표는 오름 10개다.
■ 준비부터 첫 오름 등정까지
숙소에서 가까운 오름부터 무작정 오르기엔 처음이라 조심스럽다. 검색을 하니 오름 마니아들 사이에서 입소문 난 ‘오르머’란 업체가 나온다. 제주 동부 오름이 몰린 지역에 오프라인 매장이 있다. 정보도 얻을 겸 매장을 방문해 ‘제주 100대 오름’ 수첩과 대형 지도를 챙겼다. 지도는 복권처럼 긁으면 100개 오름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도전 의지를 불태우기에 딱이다.
오르머 크루가 일일이 올라 소요시간, 난이도 등을 정리한 수첩을 뒤적이며 첫 도전지를 정했다. 탐방로가 잘 정리돼 있는 ‘백약이오름’과 ‘아부오름’이다.
첫 행선지로 난이도가 살짝 더 있는 백약이오름을 택했다. 오름 입구에 주차를 하고, 심호흡을 하며 안내판을 살핀다. 정상은 해발 356m. 자생하는 약초가 100여 가지라 백약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주차장부터 시작되는 탐방로에 접어들자 정상으로 향하는 오르막이 까마득하다. 수풀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울타리 길은 포토존으로 유명하다. 길에서 풀 내음이 물씬 풍긴다. 오름 분화구 둘레를 감싼 능선까지 다다르면 목적지가 코앞이다. 이윽고 정상에 오르자 360도, 그림 같은 풍광이 펼쳐진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땡볕더위도 한풀 꺾인다.
정상까진 20분이 채 안 걸렸지만 내려가기 못내 아쉽다. 파노라마뷰를 여유 있게 즐겨도 좋고, 정상 둘레길 한 바퀴(30분)를 더 걸어도 괜찮다.
근처에서 점심을 먹은 뒤 찾은 아부오름. ‘난이도 하’인 이유가 있다. 오르막·계단은 꽤 가파르지만 5분 만에 정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둥그런 분화구는 넓고도 깊어 아늑하다.
내친 김에 인근 용눈이오름까지 도전헀다. 휴식년제로 탐방이 금지됐다 최근 다시 개방됐다. 용이 누워 있는 모습을 닮았다는 용눈이오름은 아래서 올려다본 자태부터 앞선 두 오름과 다르다. 온통 연둣빛 수풀로 뒤덮인 가운데 점박이처럼 짙푸른 나무들이 군데군데 뿌리내렸다. 정상까지는 탐방로를 따라 둘러가야 한다. 거리는 꽤 길지만 줄곧 계단 없는 완만한 오르막이어서 발걸음이 가볍다. 정상 주변엔 ‘오름 훼손지 집중조사구역’이란 푯말과 함께 울타리가 쳐졌다. 한때 너무 많은 발걸음으로 황폐해진 수풀이 다시 초록빛을 되찾아 다행이다.
용눈이오름은 안팎 모두 매력 있다. 오름 자체도 아름답고, 정상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광도 탄성을 자아낸다. 멀리 동쪽으로 성곽을 닮은 ‘성산일출봉’이 자태를 뽐내고, 가까이 북으로는 오름의 여왕 ‘다랑쉬오름’이 우뚝 솟았다.
■ 높지만 가까운 오름
오름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한라산·성산일출봉·산방산·우도(우도봉) 등 제주 하면 떠오르는 지역이 모두 오름이다. 며칠 뒤, 제주 동쪽 성산읍 숙소에서 바라다보이던 성산일출봉에 도전했다.
예전에도 몇 번 올라 본 적 있지만 정상 풍경이 가물가물하다. 코스 대부분이 계단이었던 기억은 선명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등·하산길이 구분돼 좀 더 안전하게 오르내릴 수 있게 됐다는 점.
정상까지는 걸음에 따라 20~30분 걸린다. 중간중간 발걸음이 무거워질 때쯤이면 기이한 형태의 바위가 눈을 즐겁게 한다. 상단 전망대(쉼터)에서 망원경으로 본섬을 둘러본 뒤 마지막 힘을 짜내면 드디어 정상이다. 널찍하게 조성된 나무덱에선 오목 접시 같은 분화구 전체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해가 바뀔수록 식생이 변하는지, 분명 본 장면일 텐데 첫 만남처럼 새롭다.
하산길의 또 다른 풍광은 내려가는 걸음에 여유를 준다. 드넓은 광치기 해변과 비취색 바다 너머로, 본섬 곳곳에 올록볼록 오름들이 눈에 들어온다. 북쪽 바다 건너 우도의 모습도 정겹다.
제주에서 오름은 일상이다. 어느 동네에서든 주변엔 오름이다. 굳이 목적하지 않더라도 여정 중간, 짬을 내어 잠깐씩 오르기 좋다. 제주살이 열흘째, 미디어아트 전시관으로 인기인 ‘빛의 벙커’에 들렀다 근처 ‘대수산봉(큰물뫼)’으로 향했다. 꽤 가파른 계단을 지나 널찍한 오솔길을 오르면 전망대가 나타난다. 충분히 멋진 풍경인데 정상은 아니다. 둘레길을 따라 분화구 건너편으로 넘어가자 올레길(2코스)과 만나는 지점 근처에 진짜 정상과 전망대가 있다. 육각형 전망대 2층에 서면 제주 동쪽 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익숙한 우도·성산일출봉·섭지코지도 함께다. 정상에 놓인 흰색 의자는 대수산봉의 상징이다.
다음 날, 표선해수욕장 백사장을 거닐다 근처 매오름으로 향했다. 오름에서 내려다본 표선해변은 어떤 모습일까. 정상에서 마주한 그림은 상상 이상이다. 앞으로는 성산일출봉과 표선해변 등 동남쪽 바다 뷰가, 뒤로는 구름 모자를 쓴 한라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매오름에 내려앉은 매의 시선이 이러했으리라.
■ 오름 여행의 마무리 ‘거문오름’
오름 중에는 예약을 해야 하는 곳도 있다. 2007년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란 이름으로 세계자연유산에 선정된 지역 중 하나인 ‘거문오름’이 그렇다. 용암동굴계를 형성한 모체로 알려진 거문오름은 명성만큼 다채로운 자연의 신비를 품었다.
코스는 3가지다. 정상 코스(2.1km)는 1시간, 분화구 코스(5.0km)는 2시간 30분, 전체 코스(6.7km)는 3시간 30분이나 걸린다. 시간만 보면 부담스러워 보이지만 해설사 설명을 들으며 놀멍쉬멍(놀면서 쉬면서) 걷기 때문에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
탐방은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30분 단위로 출발한다. 적당히 구름 낀 날 오전 일찍, 예약자 20여 명과 함께 해설사 뒤를 따라 길을 나섰다. 탐방로 초입부터 우거진 삼나무 숲이 시원한 그늘을 내어 준다.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야자매트와 나무 덱이 깔려 걷기 수월하다. 다만, 반드시 정해진 길로만 해설사 안내를 따라 걸어야 한다.
정상까지 쉬지 않고 걸으면 10분이면 족하다. 정상엔 표석 하나만 있을 뿐 별다른 감흥이 없지만 실망하기엔 이르다. 출발한 지 1시간여 뒤 갈림길에서 출발지로 돌아가는 대신 해설사를 따라 분화구 속으로 향하니 별세상이 펼쳐진다.
탐방로를 따라 옆으로 용암협곡이 길게 이어진다. 원래 동굴이었는데 지붕이 내려앉으며 계곡(도랑)처럼 변한 것이다. 땅은 햇볕이 닿지 않아 은은한 습기를 머금었다. 곳곳에 이끼 옷을 입은 나무와 돌이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콩짜개덩굴로 덮인 나무에선 달팽이도 만났다. 35m 깊이의 수직동굴, 화산탄 등 용암지대 흔적도 이채롭다.
천연 에어컨 ‘풍혈’은 자연의 신비 끝판왕이다. 공기가 암석 틈 사이를 지나면서 여름엔 차갑게 식고 겨울엔 따뜻한 바람을 내뿜는다고 한다. 풍혈 가까이에 다가서자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오싹하다.
비슷한 굴이지만 가슴 아픈 역사의 흔적도 있다. 탐방로 곳곳에서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이 뚫은 갱도진지가 눈에 띈다. 거문오름에만 10여 개 굴이 뚫렸고, 120여 오름에 일본군 시설이 있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10개 오름을 목표로 했지만 8개에서 멈췄다. 무리보단 여운을 택했다. 다시 제주를 찾을 이유를 남겼다. 지도 위엔 아직 모습을 안 드러낸 오름이 한가득이다. 100대 오름 정상을 찍으려면 10년도 빠듯할 듯하다. 368개 모든 오름은 언제쯤, 누구와 다 오를 수 있을까.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