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실 문 열리자 한국인 시신 바다로 쏟아져”['8000원혼' 우키시마호의 비극]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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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 목격한 주민 시모시마 씨
“하루 20~30구씩 해변 흘러와”

우키시마호 폭침 당시를 설명하는 시모시마 무추히코 씨. 김보경 PD 우키시마호 폭침 당시를 설명하는 시모시마 무추히코 씨. 김보경 PD

“침몰 일주일 후, 선실 문이 열리자 갇혀 있던 시신들이 흘러나왔습니다.”

시모사바가 마을 주민 시모시마 무추히코(84) 씨는 78년 전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 시모사바가 마을은 침몰지와 불과 500m가량 떨어진 가장 가까운 육지다. 시모시마 씨처럼 직접 사건을 보거나 선대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주민이 지금도 다수 거주한다.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마을 인근 강가에 있다가 땅이 흔들릴 정도의 굉음을 듣고 해안가 쪽으로 달려왔죠. 배는 폭발 후에도 조금씩 움직이다 멈춰섰습니다. 배는 V자로 부서져 바다로 가라앉았고, 사람들이 배에서 나와 기둥을 타고 올라갔습니다.”

시모시마 씨의 할머니는 친척들과 엔진이 없는 배를 수동으로 몰고 가 직접 구조 작업을 벌였다. 당시 마을에서만 3~4척이 출동했다.

“바다에 헤엄치던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배에 타려고 해서, 배가 흔들리며 위험한 상황이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배는 10명 이상 타기 어려웠습니다. 구조하고 싶어도 더는 할 수 없어 배들이 철수하기도 했죠.”

침몰 이후에도 참혹한 장면은 이어졌다. 침몰 후 일주일이 지나 선실 문이 모두 열렸고, 시모시마 씨는 방에 갇혀 있던 한국인 강제징용자 시신들이 바다로 흘러나오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문이 열린 곳들은 사람들이 타 있거나 관련 물건을 보관하던 곳으로 보였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후 하루 20~30명의 시신이 해안가로 흘러왔습니다. 아침마다 4~5명의 시신을 해안가에서 봤죠. 일본 군인들은 그곳에서 5~6명의 시신을 묶어 수습했습니다.”

이날 취재진이 만난 시모사바가 마을 주민들은 우키시마호가 침몰한 앞바다는 “잔잔한 바다”라고 입을 모았다. 한 번 바닥에 가라앉은 유해는 잘 이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수중에서 유해가 발견될 가능성은 낮다는 입장이다.

인근 조선소에서 근무했던 80대 한 주민은 “마이즈루항은 입구가 좁아 물살이 세지 않고 태풍이 와도 큰 피해를 보는 지역이 아니다”면서 “수중 유해는 1950년대 우키시마호를 인양했던 옛 이이노 조선소에서 처리한 것으로 안다. 그곳에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토 마이즈루=이승훈 기자·히라바루 나오코 서일본신문 기자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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