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죽음을 무릅쓰고 쓰는 기개 넘치는 것이어야 한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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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사직소/남명 조식

부제 ‘조선을 움직인 한 편의 상소’
천둥이 치는 듯한 서릿발 같은 글
주해 번역·축어 번역 두 가지로 풀어

<을묘사직소>. 뜻있는도서출판 제공 <을묘사직소>. 뜻있는도서출판 제공

<을묘사직소>는 1555년, 조선의 대유학자 남명 조식이 55세 때 쓴 상소문을 풀이한 책이다. 상세한 ‘주해 번역’과, 말을 좇아 옮긴 일반적인 ‘축어(逐語) 번역’, 두 가지를 실었다. ‘조선을 움직인 한 편의 상소’라는 부제가 붙었다.

을묘사직소는 ‘조선에서 가장 뜨거웠던 전무후무한 글’이다. 세상이 얇고 인심이 얄팍하고 글이 가냘파질 때 붙잡을 수 있는 것이 ‘단성소’로 일컬어지는 이 글이다. 천둥이 치는 듯한, 서릿발 같은 글이다. 무릇 글이라고 할 수 있는 글이다.

남명의 이 상소문은 “글은 죽음을 무릅쓰고 쓰는 기개 넘치는 것이어야 한다”고 일깨운다. 사랍답게 살아가는 삶의 총량이 들어 있어야 제대로 된 글이라는 소리다. 아는 바와 같이 대왕대비는 깊은 궁궐의 과부에 불과하며, 임금은 돌아가신 선왕의 외로운 고아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라고 쓴 그대로다. 당시 대왕대비는 ‘여인 천하’를 구가한 문정왕후 윤씨였고, 명종은 21세로 재위 10년을 맞으면서 어머니 문정왕후의 8년 수렴청정을 겨우 벗어난 즈음이었다.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이는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이었다.

남명은 준엄했다. 먼저 명종을 야단쳤다. ‘지금 전하의 나랏일은 매우 잘못되고 있습니다. 나라의 근본인 백성의 삶은 이미 엉망진창입니다. 하늘의 뜻 또한 전하를 떠났습니다. 백성의 마음은 천지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권력을 쥔 자들을 꾸짖었다. ‘지금은 아첨하는 소인배들이 추악한 돼지와도 같이 올바르지 못한 마음으로 군자를 해치려 하는 때입니다.’

남명은 명실사부한 조선 최고의 유학자다. 퇴계 이황을 넘어서는 훤칠한 면모를 지녔다. 퇴계는 “부귀를 경계하라”고 했으나 땅이 36만 평, 노비가 250~300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남명은 가난하여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시냇가에 살면서 고기 잡을 그물조차 없었다. 그가 말년에 산 곳이 지리산 산천재였는데 그 앞에 천이 흐르고, 저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곳이었다. 그는 가난을 스스럼없이 누렸던, 웅숭깊은 인물이었다. 그가 천왕봉처럼 우뚝 선 인물이었다.

애써 말을 만들지 않았고, 가식을 가리기 위해 글을 쓰지 않았다. 그는 “말은 간략한 것을 귀하게 여긴다(言以簡爲貴)”고 했다. 그는 “송나라 주희 이후로 글을 쓸 필요가 없다”고 했다. 다 밝혀놓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글이 아니라 행(行), 실천, 삶인 것이다.

그는 경과 의를 삶의 중심에 명확하게 놓았다. 안을 밝히는 것(內明者)이 경(敬)이고, 밖으로 결단하는 것(外斷者)이 의(義)라고 했다. 임진왜란 때 의를 기치로 일어난 것이 그의 제자들이었고, 경상도 의병이었다. 광해군 때까지 그 기운이 이어졌고, 그것이 꺾인 것이 인조반정이었다.

남명이 태어난 경남 합천 삼가면 외토리에 뇌룡정이 있다. 뇌룡(雷龍)은 연못처럼 잠잠하다가 용틀임의 우레처럼 소리친다는 뜻이다. 그 소리가 담긴 것이 그의 을묘사직소다. 뇌룡정 앞에 용암서원이 있는데 그 입구에 을묘사직소 원문과 번역문을 새긴 커다란 화강암 비석이 있다. 글로써 번개를 치고, 우레소리를 낸다. 남명 사상은 경상도 정신의 골수에 닿는다. 출판사(경남 창원)의 이상영 편집장이 번역했다. 남명 조식 지음/이상영 옮김/뜻있는도서출판/125쪽/1만 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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