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를 건너온 한국문학사, 희귀도서로 보다
27일까지 부산대 중앙도서관
신정식 소장 희귀도서 전시회
1926년 ‘님의 침묵’ 초판 등 40여 권
신채호 이광수 육당 만해 윤동주 작품
오래된 책들이 저마다 역사적 유물이 되어 일제강점을 이겨낸 한국문학사를 보여준다. 이날 관람자들은 “이렇게 많은 초판본을 한꺼번에 보는 것은 처음”이라며 “한 세기를 건너온 책 권들의 문향이 예사롭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23일 부산대 중앙도서관 1층에서 개막한 희귀도서 전시회 ‘신정식 컬렉션:문학으로 식민지/조선을 읽다’는 그야말로 귀해서 값나가는 40여 권의 문학사적 책을 흔치 않게 마주하는 전시다. ‘윤동주’를 제외하고는 1908년부터 시작해 일제강점기에 출간된 것이다.
1926년 회동서관 초판 <님의 침묵>은 국내에 몇 권 없는 희귀본이다. 시가 1억 원을 훨씬 넘는다는 얘기가 있다. 그 의미는 더 깊다. 나라를 잃은 100년 전의 막막한 그 시절에 터져나온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 만해의 노래가 종내 광복을 불러왔다는 것이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이재봉 부산대 교수의 설명이다. <님의 침묵> 판본 5종이 전시 중인데 1952년 ‘해방 후 3판본’은 이제까지 그 존재 여부가 불투명했던 것으로 국내 처음 선보이는 것이다.
개막식 축사에 나선 조갑상 요산김정한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역설적으로 나라를 잃었을 때 융성한 한국 근대문학은 희망과 고난의 얘기를 깊게 아로새겼는데 그것들이 책 속의 책, 책 속의 길로 우리를 여기까지 이르게 했으며, 그 도정에서 읽은 책들이 오늘 이 자리에 있다”고 했다. 그중 하나가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윤동주가 온몸의 삶으로 썼기 때문에 우리를 끊임없이 정화하는 ‘날카로운 첫 키스’ 같은 구절이다. 윤동주의 ‘절친’으로 월북한 강처중 기자가 출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1948년 정음사본 등 3종이 전시 중이다.
차정인 부산대 총장은 축사를 통해 “귀한 자료들이 많은 이번 전시는 대학이 감당할 백년대계의 교육적 효과도 클 것”이라고 했다. 단재 신채호의 1908년 <을지문덕>은 구국의 열망을 서사화했고, 이광수의 1924년 <무정>은 근대 계몽의 대명사였고, 최남선의 1926년 <백팔번뇌>는 최초의 근대 시조집으로 시조 부흥의 역사적 징검돌이었다. 그리고 정지용의 1935년 <정지용시집>은 조선어의 아찔한 정점을 보여줬고, 이기영의 1938년 <고향>은 당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표작이었고, 홍명희의 1939~1940년 <임거정> 네 권은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전범이었다. 김억 나도향 황석우 권환 유치환 임화 김기림 김영랑 이태준 심훈 한설야…, 외기도 숨가쁜 그들의 이름이 찍힌 1920~1930년대 책이 문학사적 빛을 발하고 있다.
눈에 띄는 그림도 몇 있는데 그중 월북한 윤복진의 1939년 동요집 <물새발자옥>에 한국 인상주의 대가 이인성의 판화가 표지에 올려져 있다. 국내 4~5권밖에 없다는, 염상섭의 1924년 소설집 <견우화> 표지는 ‘당대의 신여성’ 나혜석이 그린 나팔꽃 그림이다. 그리움과 질시를 오가며 염상섭에게 ‘묘하게’ 각별했던 존재인 나혜석을 엿볼 수 있는 자료다.
특이한 것도 한둘이 아니다. 1934년 <방가>는 소설가 길에 들어서기 전에 시를 썼던 황순원의 첫 시집이다. 1913년 <허부인난설헌집>은 17세기 ‘동래부 중간본’을 저본으로 삼아 근대에 처음 인쇄된 것이다. 그런데 발행자 이름 유자후 앞에 ‘부인’이라고 기록해 110년 전 책 편집자가 여성임을 각별히 밝히고 있다. 비극적 삶을 살다간 포석 조명희의 1928년 소설집 <낙동강>도 국내 몇 권 없는, 억 단위 시가를 호가한다는 귀중본이다. 이 소설집은 ‘낙동강 구포벌’을 처음 소설화했다는 것과, ‘백악사’라는 부산 영주동 소재 출판사에서 찍었다는 것이 ‘지역적으로’ 주목할 점이다.
전시된 책들을 수집한 신정식 씨는 부산대 총동문회장을 지낸 기업인이다. 그는 “수집한 좋은 책들에 묵직한 책임감을 느끼는 ‘질문 단계’에 이르러 있었는데 그것에 답하는 첫 계기를 마련한 것 같아 기쁘다”고 했다. 전시는 부산대 도서관(관장 이용재), 요산문화연구소, 도서출판 전망이 공동으로 꾸렸는데 서정원 전망 대표는 “2년 전 컬렉션의 양과 질을 보고 크게 놀랐으며, 이번 전시는 그 놀라움의 작은 부분을 표현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책향, 소중한 인연> 도록이 출간됐으며, 전시는 27일까지 이어진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