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봉 일출 보려면 3대가 덕 쌓아야…등산 초보의 지리산 ‘성백 종주’ 도전기
노고단 정상에서 바라본 일출. 가까이 반야봉(왼쪽)은 구름에 둘러싸였고, 멀리 천왕봉(가운데) 주변 하늘은 붉게 물들어 환상적이다.
산을 잘 몰라도 ‘지리산’ 세 글자는 익숙하다. 지리산 천왕봉(해발 1915m)은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 본토 최고봉이다. 경남·전남·전북 3개 도에 걸쳐 있는 민족의 영산. 언젠가 한 번 오르리란 다짐이 ‘지리산 종주’까지 닿았다. 주 능선을 따라 천왕봉을 비롯해 여러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산행은 상상만으로도 뿌듯하다. 평소 산을 거의 타지 않는 초보 산꾼에겐 곧장 정상을 오르는 등반보단, 비슷한 높이의 능선을 걷는 종주가 더 괜찮지 않을까. 마침 이달 말은 지리산 단풍이 절정이라, 버스표부터 끊었다.
■ 노고단, 기나긴 종주의 시작일 뿐
산꾼들은 성백 종주(성삼재~백무동)와 화대 종주(화엄사~대원사)를 대표적인 지리산 종주 코스로 꼽는다. 상대적으로 수월한 성백 종주로 코스를 잡았다. 전남 구례공영버스터미널 근처에서 1박을 한 뒤 새벽 4시, 택시를 타고 성삼재휴게소로 향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도로를 달리는 동안 차량 2대를 앞질렀다. “이 시간에 움직이는 차들은 다 성삼재로 가는 등산객입니다.” 동네 토박이인 택시기사의 말은 정확했다. 성삼재휴게소에 도착해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하나를 베어 물자 곧 차량 2대가 도착했다.
성삼재 탐방로 입구는 오전 3시부터 개방된다. 노고단고개까지는 2.3km. 탐방안내도에 따르면 전체 종주 구간 중 가장 쉬운 코스다. 오전 4시 40분. 드디어 첫발을 내디뎠다. 초행길이라 앞무리와 뒷무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칠흑 같은 밤, 보이는 불빛이라곤 종주 일행들의 헤드렌턴과 하늘에 뜬 그믐달이 전부다.
성삼재휴게소에서 시작하는 탐방로 입구. 오전 3시부터 길이 열린다.
노고단대피소를 지나 노고단고개로 향하는 길. 밤을 밝히는 건 헤드렌턴과 달빛이 전부다.
무넹기를 지나자 계단 길과 ‘편안한 길’로 나뉜다. 호기롭게 계단 길을 택했다. 나무 덱 계단을 오른 뒤, 다시 한 번 편안한 길이 아닌 돌계단으로 접어들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마지막 계단을 오르면 노고단대피소다. 현재 공사 중이지만 화장실 이용은 가능하다. 잠시 재정비를 한 뒤 어느 가족 일행을 뒤따른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잠깐 쉬는 사이 그들을 앞질렀다. 산린이의 첫 추월. 기분이 묘하다.
이윽고 노고단고개에 도착했다. 출발 1시간 만이다. 오전 5시 40분인데 벌써 동쪽 하늘이 노랗게 달아오른다. 일출을 보기 위해 서둘러 노고단으로 향한다. 노고단 정상에 오르려면 인터넷 예약이 필수다. 특별보호구역이라 오전 5시부터 오후 4시까지만 열린다. 입구 격인 노고단탐방지원센터를 통과하면 정상까지 700m 정도 편안한 나무 덱 길이 이어진다. 20분만 걸으면 정상이다. 해발 1507m 노고단 표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돌탑 곁에서 일출을 기다린다. 하늘이 밝아지면서 가까이 반야봉부터 멀리 천왕봉까지, 앞으로 만날 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온다. 오전 6시 20분. 천왕봉 주변 하늘이 한층 붉게 물들었지만 구름에 가린 해는 얼굴을 내어 주지 않는다.
해발 1507m 노고단 정상. 노고단에 오르려면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한다.
일출 시간, 구름에 가린 해가 온 하늘을 발갛게 물들였다. 왼쪽에서 두 번째 가장 높은 봉우리가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1915m)이다.
노고단 정상에서 노고단고개로 내려가는 길. 구름이 포근하게 내려앉았다.
■ 해발 1315m에서 장터가 열렸다는데
첫날 목적지인 세석대피소까지 가려면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노고단고개로 다시 내려와 천왕봉으로 향하는 탐방로로 접어들기 직전, 드디어 구름 위로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출의 기운을 받은 덕분인지 돼지령을 지나 피아골삼거리까지 발걸음이 가볍다. 노랑·하양·연보라 색깔의 이름 모를 들꽃도 눈에 들어온다. 삼거리에서 천왕봉 이정표를 따라 10분쯤 걸으면 임걸령샘이다. 종주 구간에 만나는 몇 안 되는 샘이라 목을 축이고 물병도 채운다. 다음 목표인 노루목까지는 꽤나 가파른 돌길 오르막이다. 호흡이 가빠지는 가운데 ‘당신의 심장은 안녕하십니까’ 안내판이 나타난다. 국립공원 사망사고 1위가 심장돌연사라는 문구에, 긴장의 끈을 조인다.
노루목에 다다르자 등산배낭 여러 개가 눈에 띈다. 반야봉을 찍고 오려는 이들의 짐이다. 옆에는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다. 맞은편에서 오던 이들이 눈살을 찌푸린다. 지리산에는 쓰레기통이 없어 자신의 쓰레기는 도로 가져가야 한다. 짐이 많을수록 쓰레기도 늘어나니, 배낭 무게를 줄이는 게 여러모로 현명하다.
노루목 가는 길에 만난 임걸령샘. 손이 시릴 정도로 물이 시원하다.
노루목에서 반야봉을 오르는 이들이 잠시 내려놓은 배낭들. 잃어버릴 일은 거의 없지만 먹이를 찾는 반달곰을 조심해야 한다.
반야봉을 건너뛰고 곧장 삼도봉으로 향했다. 오전 8시 30분. 출발 4시간 만에 다다른 삼도봉 너럭바위엔, 경남·전남·전북 3도의 경계점을 나타내는 삼각뿔 모양 표석이 박혔다. 인간이 만들어 낸 경계일 뿐, 자연은 영호남·동서남북 구분이 없다. 배가 출출하지만 겨우 목표의 3분의 1쯤 왔을 뿐이다. 연하천대피소에서 이른 점심을 먹기로 하고 초콜릿 몇 개를 털어넣은 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지리산은 대체로 초록빛이지만 해발 1500m대 고지대로 접어들자 몇몇 나무들이 단풍 옷으로 갈아입는 중이다. 경치 감상도 잠시, 채 1km가 안 되는 화개재까지 급경사의 연속이다. 가파른 나무 덱 계단이 까마득하게 이어진다. 내려가는 것도 조마조마한데, 반대편에서 오는 이들의 마음은 어떨까. 어림잡아 수백 개 계단을 꾸역꾸역 올라오는 이들을 마주쳤다. 보통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기 마련인데 하나같이 조용하다. 말 한마디도 아껴야 할 정도로 힘든 구간이다.
오전 9시께 도착한 화개재 일대는 식생 복원을 위해 높은 울타리가 쳐져 있다. 화개재는 옛날 경남 하동군 화개면과 전북 남원시 산내면 주민들이 만나 물물교환을 하던 곳이다. 해발 1315m에서 장터를 열 만큼 남원에는 소금과 해산물, 하동엔 곡식·산나물이 귀했으리라.
삼도봉의 경상남도·전라남도·전라북도 경계에 세워진 표석.
삼도봉에서 바라본 지리산 남쪽 풍광. 겹겹이 포개진 산이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화개재로 향하는 급경사 계단.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이들은 말이 없다.
화개재 일대는 식생 복원 중이라 탐방로로만 지날 수 있다.
■ 배를 채우니 몸은 무거워지고
화개재부터 토끼봉까지 1.2km는 난코스다. 30분 정도 돌길 오르막이 이어진다. 돌길 한가운데 나무를 베어 내지 않고 살렸다. 아마도 종주 구간 중 가장 많은 사람 옷깃이 스친 나무이리라. 돌길을 정신없이 올라 드디어 토끼봉(1534m)에 다다랐다. 토끼처럼 뒷다리가 길었다면 좀 더 쉽게 오를 수 있었을까. 이름과 달리 귀엽지 않은 봉우리인 것만은 분명하다.
아직 첫날 목표의 절반도 못 왔는데 체력은 70% 이상 소진된 느낌이다. 토끼봉 정상의 탁 트인 헬기장 가장자리에 짐들을 내팽개친 채 다리를 뻗고 앉았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진다. “지리산을 만만하게 봐선 안 된다”는 산꾼들의 조언이 귓가를 맴돈다. 이미 엎질러진 물, 어떻게든 저녁까진 세석대피소에 닿아야 한다.
헬기장이 있는 토끼봉. 내팽개치듯 짐을 내려놓았다.
바위에 피어난 이끼가 예술 작품처럼 아름답다.
산행 길에 만나는 열매들. 맛을 보고 싶지만 산짐승들에게 양보해야 한다.
몇 걸음 옮기자 토끼봉 쉼터가 나타났지만 외면하고 다음 지점인 연하천대피소로 향했다. 거대한 노거수와 새빨간 열매들, 쓰러진 나무와 바위를 뒤덮은 이끼 등 자연의 신비가 곳곳에 널렸지만 한눈으로 보고 한눈으로 흘린다. 명선봉을 찍으면 비로소 내리막이다. 대피소가 가까워졌다는 신호다.
오전 11시 30분. 출발 7시간 만에 연하천대피소에 다다랐다.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더니 찬 바람이 분다. 오전 내내 땀 흘렸는데, 이젠 따뜻한 식사로 몸을 녹여야 할 판이다. 품을 줄이기 위해 전투식량을 준비해 오길 잘했다. 찬물만 부으면 안에서 끓어 10분 만에 뚝딱 라면밥이 완성된다. 한술 뜨려는데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지리산 고양이는 무얼 먹고 살까. 미안하지만 산고양이를 챙길 여유가 없다.
배를 채우고 나니 눌러앉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안내도를 보니 세석대피소까지 5시간 30분을 더 걸어야 한다. ‘5분만 더’를 되뇌다 점심식사로 1시간을 써 버렸다.
출발 7시간 만에 도착한 연하천 대피소. 구름이 드리우면서 갑자기 날이 추워졌다.
물만 부으면 안에서 끓어오르는 전투식량. 따뜻한 국물이 있는 라면밥으로 몸을 녹인다.
■ 겨우 도착한 세석대피소, 내일은 어떻게
다음 지점인 벽소령대피소로 출발하는 탐방로 초입에 붉은 단풍나무가 배웅한다. 평지가 이어지나 싶더니 이내 삼거리(삼각고지)에서 벽소령 쪽으로 오르막이다. 유독 기암괴석이 많이 보인다. 거대한 바위 사이로 길이 이어진다. 바위와 나무가 우거진 지점에서 길을 잃을 뻔했다. 쓰러진 나무를 뛰어넘어 직진했는데 길이 아니다. 옆으로 누운 나무가 길이 아님을 알리는 표식이었던 모양이다. 종주 구간은 전체적으로 이정표도 많고 길이 잘 이어져 있지만 간혹 헷갈리는 지점이 있어 잘 살펴야 한다.
남쪽 능선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너럭바위에서 잠깐 숨을 고른 뒤 형제봉까지 내처 걸었다. 형제처럼 나란히 선 바위는 유독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다시 부지런히 걸어 벽소령대피소에 다다랐다. 점심으로 원기를 보충한 덕분일까. 2시간 거리를 20분 넘게 앞당겼다.
지리산은 대피소마다 식수대가 있다. 물맛도 다른데, 벽소령보단 연하천 물이 시원하다. 출발 10시간 만에 처음으로 등산화를 벗었다. 신발 안에 언제부터인지 작은 돌과 모래가 들어가 있었다. 발가락을 괴롭혔던 녀석들이다. 입산시간 지정제에 따라 벽소령에서 세석대피소로 향하는 길은 오후 2시(하절기)까지다.
벽소령대피소로 가다 길을 잃을 뻔했다. 통나무 넘어 길이 이어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우뚝 솟은 형제봉의 두 바위.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오후 2시 넘어서 벽소령대피소에 닿았다. 세석대피소까지 가려면 원래 오후 2시엔 벽소령을 출발해야 한다.
오후 2시 30분. 통제시간을 살짝 넘겼지만 탐방로로 진입했다. 예약한 대피소에서 1박을 하려면 달리 방법이 없다. 출발 10분 만에 온통 주변이 구름으로 휩싸인다. 산 날씨는 시시각각으로 변한다는 걸 지리산이 제대로 보여 준다. 세석까지는 아직 덕평봉·칠선봉·영신봉까지 3개 봉우리를 넘어야 한다.
체력이 고갈되는 만큼 휴식 단위가 짧아진다. 초반엔 1시간도 거뜬했는데, 이젠 30분도 안 돼 걸음을 멈추게 된다. 선비샘 전망대를 핑계 삼아 또 한 번 휴식이다. 벽소령보다 세석이 더 가까워진 지점. 갑자기 푸다닥 소리와 함께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올려다보니 까마귀다. 세석까지 2km 남짓, 날아가면 몇 분인 거리인데, 사람에겐 몇 시간이다. 이토록 새가 부러울 수가 없다.
칠선봉은 이름에 걸맞게 가까워질수록 구름으로 휩싸인다. 다리는 돌덩이지만, 풍경만큼은 신선이 구름 속을 거니는 듯하다. 칠선봉을 지나 영신봉까지는 이날 마지막 오르막 코스다. 막바지에 나무·철재 계단이 화룡점정을 찍는다. 오후 5시 50분, 해발 1652m 영신봉에 다다랐다. 남은 내리막 600m를 내달리듯 걸어 10분 만에 세석대피소에 도착했다. 온통 구름에 휩싸인 대피소는 아늑하기보다 신비롭다.
총 24km, 13시간이 넘는 산행에 몸도 마음도 방전됐다. 눈도 지쳤는지, 식수장 화살표를 거꾸로 봐 반대편으로 50m를 올라갔다 왔다. 바닥난 체력이 지하로 내려갔다. 다음 날 천왕봉 일출(오전 6시 29분)을 보려면 얼마나 일찍 일어나야 할까. 오늘의 보람보다 내일의 걱정이 크다.
선비샘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광. 산에서 구름이 피어오르는 듯히다.
칠선봉 주변으로 구름안개가 자욱해 신선이 사는 마을 같다.
칠선봉을 지나 영신봉까지 구름안개가 산 전체를 에워싸,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1박을 한 세석대피소. 지리산 대피소 중에서 최신식에 규모도 제일 크다.
■ 잠보다 해, 천왕봉 일출을 만나러
밤새 뒤척이다 산행 허용 시간인 오전 3시에 맞춰 세석대피소를 나섰다. 10명 정도가 함께 채비한다. 천왕봉 일출을 목표로 하는 이들이다. 천왕봉 등반의 베이스캠프 격인 장터목대피소까지는 3.4km. 평소라면 2시간 코스지만, 캄캄한 밤인 데다 안개까지 자욱해 얼마나 걸릴지 미지수다. 전날 해발 1400~1600m 고지를 오르내렸다면 이제부터는 1900m 고지까지 본격 등반이다. 출발 30분 만에 촛대봉(1703m)에 닿았지만 이정표가 아니라면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악천후다. 중간에 길을 잃을 뻔도 했다.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지고 바람도 세차게 불어, 최대한 앞쪽 일행에 바짝 붙어 걸음을 옮긴다. 앞서가던 이 중 한 명의 다리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동료가 배낭 짐을 덜어 주려는 데 본인은 한사코 만류한다. 산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고, 서로 돕게 한다.
멀리 자욱한 구름안개 속으로 불빛이 보인다. 장터목대피소 취사장이다. 시계를 보니 예상보다 10분 앞당겼다. 취사장 안에는 장터목에서 묵은 이들과 세석대피소에서 합류한 이들이 함께 모여 최종 등반을 준비 중이다. 백무동으로 하산하려면 천왕봉을 찍고 다시 장터목으로 내려와야 한다. 굳이 배낭을 메고 왕복할 필요가 없어 취사장 한구석에 고이 모셔 놓았다.
새벽 3시에 출발해 30분 만에 촛대봉에 닿았지만, 안개 때문에 위치를 분간하기 쉽지 않다.
장터목대피소의 취사장 불빛. 천왕봉을 오르기 위한 마지막 베이스캠프다.
오전 5시. 드디어 천왕봉을 향해 막바지 걸음을 내딛는다. 나무 덱 계단부터 시작해 정상까지는 대부분 오르막이다. 사방은 아직 칠흑 같은 어둠이다. 이정표에 적힌 해발 고도를 보며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짐작할 뿐이다. 20분 만에 제석봉(1808m), 30분을 더 걸어 통천문(1814m)에 닿았다. 남은 구간은 500m. 바위 돌길과 철재 계단을 번갈아 오르는 와중에, 위쪽에서 불빛이 보인다. 오징어잡이 배 같은 불빛들이 일렬로 줄지어 계단을 내려오는 중이다. 한 대안학교 학생들이 벌써 천왕봉을 찍고 내려오는 길이다. 체험학습으로 천왕봉 등정이라니. 마음 속으로 엄지척을 건넨다.
정상 부근 구상나무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았다. 아랫동네와는 다른 세상이다. 오전 6시 20분, 이윽고 천왕봉 바로 아래 공터에 도착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찬 바람을 맞으며 바위에 오르니 드디어 정상이다. 평소라면 사방으로 탁 트인 풍광이 펼쳐질 테지만, 안타깝게도 온통 구름에 휩싸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 덕이 부족한 초보 산꾼 따위에게 이날 지리산은 일출을 내어 주지 않았다. 천왕봉 정상 표석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남들보다 먼저 하산한다.
천왕봉 정상 바위가 온통 구름에 둘러싸여 있다.
천왕봉 정상 표석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다양한 포즈를 구상했지만 다음 사람을 위해 빨리 비켜 줘야 한다.
원래라면 천왕봉 정상에서 안내판 속 풍경이 보여야 하지만 구름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천왕봉에서 장터목대피소로 하산하는 길. 구름이 조금씩 걷히고 있다.
장터목대피소로 돌아와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한 뒤 오전 8시 다시 길을 나섰다. 백무동으로 내려가는 길은 마지막까지 방심해선 안 된다. 특히 막바지로 내려갈수록 돌길이 험해 긴장을 놓았다간 다치기 십상이다. 5.8km 내리막에 3시간이나 걸리는 이유다. 발가락에 잡힌 물집이 내리막에서 더 괴롭힌다. 30분 단위로 쉬어 가며 소지봉·참샘을 지나 오전 11시, 드디어 종착지인 백무동탐방지원센터에 닿았다.
1박 2일 동안 총 36.7km, 21시간 30분에 걸친 성백 종주가 무사히 끝났다. 첫째 날 4만 4000보, 둘째 날 3만 8000보, 도합 8만여 걸음이다. 뿌듯함보다 안도감이 앞선다. 무모한 도전을 무사고로 마쳤다는 게 중요하다. 천왕봉 일출을 못 봤으니 다시 지리산을 찾을 이유가 생겼다. 그때까지 덕을 많이 쌓으리라. 산은 사람을 착하게 만든다.
'성백 종주'의 마지막인 백무동으로 내려오는 길은 상당 구간이 돌길이어서 발을 잘 디뎌야 한다.
오전 11시, 세석대피소 출발 8시간 만에 종착지인 백무동탐방지원센터에 도착했다. 무사히 종주를 마친 것만으로도 지리산에 감사할 일이다.
그래픽=류지혜 기자 birdy@
■ 지리산 종주에 도전하기까지
산꾼들에 비하면 등산 입문자 수준이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지리산 종주에 도전한 건 아니다. 산을 타 본 경험은 많지 않지만 다른 운동은 꾸준히 하는 편이다. 일주일에 2~3번 헬스장에서 근력 운동을 하고, 격주로 2시간씩 풋살도 해 왔다. 그래도 등산할 때 쓰는 근육은 다르다. 연습 삼아 금정산이라도 다녀올 걸, 나중에 후회했다.
대신, 지리산 종주 경험이 몇 번 있는 지인에게 조언을 구했다. 1박 2일 코스 짜기와 준비물, 주의해야 할 점 등을 몸과 마음에 새겼다. 지면을 빌려 지인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등산스틱과 배낭, 장갑과 발목·무릎보호대 등 웬만한 장비는 챙겼다. 부상을 당할 뻔한 순간이 몇 차례 있었지만 보호대 덕분에 모면할 수 있었다.
산은 정복 대상이 아니다. 천왕봉 일출도 산이 허락해야 만날 수 있다. 처음부터 목표를 높게 잡기보단 동네 뒷산부터 차근차근 준비하길 권한다. 혼자보단 함께가 좋다. 연하천·장터목대피소에서 묵는 2박 3일 코스가 1박 2일보다 무난하다. 두 대피소는 특히 붐비니 일찍 예약해야 한다.
전남 구례공영버스터미널 인근 '전통순대백화점'. 대표메뉴인 순대국밥엔 순대뿐만 아니라 내장이 푸짐하게 들었다.
경남 함양군 지리산옛술도가 꽃잠막걸리는 지리산흑돼지와 잘 어울린다.
성백 종주에 도전한다면 출발 전과 도착 후, 든든하게 배를 채우도록 하자. 구례공영버스터미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전통순대백화점’은 이름처럼 순대국밥이 유명하다. 진한 국물에 순대와 내장이 푸짐하게 들었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파김치도 궁합이 좋다.
백무동(함양군 마천면)으로 하산한 뒤엔 버스를 타면 금계마을이 가깝다. ‘지리산옛술도가’에 들러 꽃잠막걸리와 흑돼지삼겹살을 곁들이면 피로가 확 풀린다. 그래도 과음은 금물. 산행 후라 평소보다 빨리 취할 수 있으니 유의하자.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지리산 종주 도중 만난 야생화.
지리산 종주 도중 만난 야생화.
단풍잎 하나가 무늬처럼 나무에 붙었다. 지리산 단풍은 이달 말이 절정이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