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진보와 보수는 완전히 결별하지 못한다
정소희 공모 칼럼니스트
변화 수용하는 태도 차이로
진보와 보수 프레임 가둬져
더 나은 사회로의 염원에선
화해의 희망도 발견하게 돼
각자의 신념 한계 인정하고
겸손히 상대 입장 존중해야
10월 말 핼러윈 시즌이 다시 찾아왔고 이태원 참사가 1주기가 되었음을 새삼 떠올린다. 유령이나 귀신, 각종 캐릭터 복장과 분장을 하는 미국의 코스튬 파티인 핼러윈 축제는 한국에 소개되어 젊은 층 사이에서 하나의 놀이문화로 유행해 왔다. 대학생 때 같은 장소에서 핼러윈을 보내며 발 디딜 틈 없는 인파와 숨 막히는 공기에도 집에 돌아가기보다 친구들과 놀고 싶었던 소란스러웠던 밤을 기억한다. 작년 핼러윈은 코로나로 억눌렸던 청춘들의 만남에 대한 갈증과 일상을 벗어나고 싶었던 욕구가 어느 때보다 크게 분출했으리라 짐작된다.
안타깝고 황망한 죽음 앞에서 깊은 슬픔과 애도를 많은 국민들이 함께 나누었다. 그중에서는 무분별하게 서구문화를 받아들인 사례로 핼러윈을 지목하거나 외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청년들의 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표면적으로 사건은 미국의 축제를 즐기면서 한국의 젊은이들이 압사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는 것에서 반박할 수 없는 아이러니를 낳았다. 그러나 젊은 친구들의 입장에 서면 이태원 핼러윈 축제로 발걸음이 향했던 자연스러운 마음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새로운 것에 흥미와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트렌드를 빠르게 캐치하고 그 변화에 동참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에 따라 지닌 성향의 차이가 가장 크겠지만 그럼에도 연령에 따라, 세대에 따라, 상대적으로 어렸을 때 우리는 새로움을 더 잘 좇는다. 단골 가게에 충성하기보다 새로운 맛집을 조사하고 오래된 우정만큼이나 새로운 친구 사귀기에 열중하고 익숙한 문화가 아닌 참신한 문법과 양식들에 마음을 빼앗긴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새로움보다 친숙함에서 편안함의 가치를 찾고 변화보다는 안정을 선호한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환경이 내포할 수 있는 불편과 위험을 더 예민하게 감지하기도 한다. 앞서 연령과 세대를 언급한 건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익숙함을 추구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곤 하기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의 피해자가 대부분 20대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가장 새로운 문화에 열정적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새로움과 변화에 대한 개방성은 단지 개인 성향이나 생애주기의 차이로 여겨지는 걸 넘어 오늘날 사회적으로 프레임에 가둬지기도 한다. 예컨대 정치적 프레임으로는 진보와 보수를 이분법처럼 나누고 양 진영은 치열하게 대립한다. 어떤 정치와 정책이 우리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가에 대해 서로 다른 방향과 각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두 집단은 쉽게 화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희망을 찾는다면 결코 ‘퇴보’를 바라는 쪽은 없으리라는 것이다. 설령 그렇게 느껴지더라도 말이다. 공통적인 목표가 지금보다 좋은 세상이 되기를 바라고 그것이 개선이라고 한다면 진보라는 단어를 한쪽에서만 독점하는 것에도 재고가 필요할지 모르겠다.
진보와 보수에 대한 해석은 상대적으로 새로운 변화에 ‘더’ 개방적인 성향과 ‘덜’ 개방적인 성향의 차이로 달리 여겨지는 방향이 가능할 것이다. 예컨대 현 체제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는 진보는 역사적으로 처음 자본주의가 대두되었을 때 전례 없는 참신한 시스템과 확산되는 도시화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이었던 반면 기존 질서를 따르는 보수 쪽은 오히려 자본주의를 배척하고 중농주의를 지지했다. 그러나 200년의 세월이 지나고 이제 자본주의가 굳건한 질서로 정착한 시기에 진보는 새로운 대안들로 변화를 모색하고 보수는 기존 질서를 강화하고자 한다.
한편 경제적으로는 변화와 안정의 가치를 두고 혁신과 정체라는 프레임을 씌운다. 이분법이 내재한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가치판단은 우리에게 암묵적으로 혁신의 가치를 추구하라고 권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존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는 용기와 도전적인 자세가 기업가적 혁신으로 칭송받는다. 파괴적인 혁신들 덕분에 우리 삶은 풍요롭고 윤택해졌다. 하지만 혁신의 이면에는 파괴적인 폭력을 휘둘렀던 역사들도 즐비하다. 서구 사회에서 최초로 세계를 일주한 마젤란과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부터 이어진 식민지 개척과 약탈, 제국주의는 현대사회가 선망하는 혁신이라고 감히 평할 수 있는 사건들이기도 했다.
현재에 만족하기엔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요구되는 셀 수 없는 변화들이 여전히 산재하고 그런 입장은 자주 변화의 수용성이 낮은 측과 대립한다. 하지만 어느 쪽에 속하더라도 지금 옳다고 믿는 신념은 각자에게 주어진 조건과 시대적인 세계관 안에서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존재한다. 필연적으로 어떠한 자기 확신도 상대성의 제약적인 논리 아래 불완전한 판단이라면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건 겸손한 마음 정도일까. 누군가 슬픔과 아픔을 말할 때 내 입장은 일단 접어 두고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존중을 겸손이라고도 부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