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영감] ‘PCB 물감’으로 그려 나가는 조화로운 세상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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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영감] 김봉관 작가

인쇄회로기판 작품 재료로 활용
“기판 조합으로 새로운 세상 표현”
2018년 VR 만나면서 작업 확장
동료 작가와 협업, 증강현실 전시
“평등하고 하모니 이룬 세상 꿈꿔”

김봉관 작가가 부산 중구 중앙동 전시장에서 아날로그 작품 ‘은하수’를 통해 구현되는 AR 이미지를 태블릿PC로 보여주고 있다. 오금아 기자 김봉관 작가가 부산 중구 중앙동 전시장에서 아날로그 작품 ‘은하수’를 통해 구현되는 AR 이미지를 태블릿PC로 보여주고 있다. 오금아 기자

‘인쇄회로기판(PCB)’ 컴퓨터, TV, 자동차 등 전자·기계 제품 속에 부품을 장착하는 기판이다. 부산 영도구 남항동에 위치한 김봉관 작가의 작업실에는 이런 PCB가 종류별로 쌓여 있다. 작가는 “PCB는 나에게 물감과 같다”고 말했다.

김 작가는 건국대에서 현대미술을 전공했다. “2학년 때 컴퓨터 메인보드의 기계적 풍경을 작업으로 표현했어요. 부조 형식으로 도시를 만들면서 ‘내가 이런 작업을 하고 싶었다’는 것을 알았죠.” 서로 다른 모양의 기판을 조합하며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은 그에게 게임과 같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거제도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왔어요. 갑자기 환경이 바뀌며 사춘기를 심하게 겪었어요.” 다른 세상과 환경을 갈망하던 중학생은 애니메이션·사이버펑크 문화에 빠져 들었다. PCB를 이용한 작업도 이런 취향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김 작가는 메인보드 위에 정교하게 가공된 가상의 공간을 구축했다. “PCB에서 회화적인 것을 발견했어요. 조각 같은 입체 기반의 전공을 했으니 오브제로 회화를 했다고 볼 수 있죠.”

김봉관 작가에게 인쇄회로기판(PCB)은 물감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오금아 기자 김봉관 작가에게 인쇄회로기판(PCB)은 물감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오금아 기자
김봉관 작가의 초기 작업 '바깥 풍경'. 작가 제공 김봉관 작가의 초기 작업 '바깥 풍경'. 작가 제공

2013년 김 작가는 첫 개인전에서 ‘내 안의 즐거움과 환희’의 원인을 탐구한 작품을 선보였다. 전자기판을 모아 금박을 더하고, 라이트박스를 달았다. 작품을 본 사람들은 ‘특이하다’고 말했다. 디지털 기술 문명의 화려함을 표현한 작품도 있었고, 각종 전자 부품으로 재현한 도시 풍경에서는 강처럼 물이 흐르는 이미지가 드러나기도 했다. “기판이 모이는 방식이나 형식에 따라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지는 거죠.”

한때 김 작가는 PCB를 직접 만들 생각도 해봤다. “공장에서 나온 기판을 그대로 사용하면 연출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죠. 그런데 PCB 제작이 쉬운 것이 아니더군요. 대신 오브제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다양한 형식적 변화를 시도했어요.” 그러다 2018년 VR(가상현실)을 만났다. “처음에는 교육적 차원에서 접근했어요. 작가들과 같이 공부하며 전시를 해보자고 했죠.” 김 작가는 부산문화플랜 김지영 대표, 김대석(테크니션) 이사와 함께 ‘예술가를 위한 실감형 미디어아트 워크숍’(2019년)을 진행했다. 김 작가까지 총 7명이 참여해 3차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틸트브러쉬’ 사용법 등을 연구했고, 이 결과물은 이듬해 열린 부산국제화랑아트페어에서 소개됐다.

김봉관 작가의 작품 ‘빛의 성당’. 이태석 신부에 대한 추모의 의미가 담긴 작품이다. 오금아 기자 김봉관 작가의 작품 ‘빛의 성당’. 이태석 신부에 대한 추모의 의미가 담긴 작품이다. 오금아 기자

VR, AR(증강현실), MR(혼합현실)을 통합한 ‘XR(확장현실) 아트’는 김 작가의 작업에 날개를 달아줬다. “가상공간은 파도 파도 계속 나오는 우물 같아요. 가상공간에서 비트(bit)를 오브제로 생각했고, 그 안에서 조형적인 조화미를 찾으려고 했어요.” PCB의 조합에서 나오는 패턴이나 문양이 가진 아름다움, 또 그 속에 숨은 작가만의 이야기들. 아날로그 작업에 실감형 미디어아트 기술이 더해지며 김 작가는 자신의 눈에만 보이던 것들을 관람객에게 더 쉽게 전달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김 작가는 2022년 말부터 올해 8월까지 광주시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서 열린 전시 ‘사유 정원-상상 너머를 거닐다’에 참여했다. 이 전시에서 그는 금강경과 노자·장자의 철학에서 영감을 얻은 ‘있음, 없음’으로 비트로 만들어진 유토피아를 제시했다. “디지털 가상세계에는 정해진 것이 없어요. 첫 개인전 ‘엘리시움’이나 ACC 전시나 모두 선인들의 이상향을 표현한 것이죠.”

김봉관 작가의 '경계에 서다'. 김 작가는 PCB로 만들어진 작품에서 미적 아름다움을 발견하는데, XR 아트와 만나면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관람객에게 더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오금아 기자 김봉관 작가의 '경계에 서다'. 김 작가는 PCB로 만들어진 작품에서 미적 아름다움을 발견하는데, XR 아트와 만나면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관람객에게 더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오금아 기자

최근 김 작가는 선후배 작가들과 색다른 AR 전시를 기획했다. 국립부산과학관과 부산시민공원에서 AR 작품을 소개하는 ‘발견되는 감각들’이다. 야외 공간에서 진행되는 위치 기반 AR전시로 스마트폰에 앱을 다운로드 받으면 누구나 감상할 수 있다. 김 작가는 대중과 소통하는 장을 만드는 기술 적용과 협업에 즐거움을 느낀다고 했다. “해보니 협업 시스템이 너무 좋은 거예요. (함께 나누는) 예술의 힘을 알고 나니 머리 속에 불이 켜지더군요. 교육을 하고, 전문가와 협업하면서 이제 진짜 동시대미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 작가는 내년에는 국제 교류 전시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영감의 시작은 반항심이었죠.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에 푹 빠졌는데 시간이 지나니 영감이 사그라들더군요. VR을 알게 되고, 협업을 하고, 내가 연구한 것들을 외부로 알리며 행복감을 느껴요.” 김 작가는 긍정적인 것을 세상과 나누며 또 다른 예술을 향한 영감을 얻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부산이 XR 아트 거점 도시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김봉관 작가의 AR 작품 ‘하모니’. 이 작품은 오는 13일까지 부산시민공원에서 만날 수 있다. 작가 제공 김봉관 작가의 AR 작품 ‘하모니’. 이 작품은 오는 13일까지 부산시민공원에서 만날 수 있다. 작가 제공

김 작가는 또따또가 5기 입주작가이다. 부산 중구 중앙동에 있는 디지털 작업·전시 공간에서 작품을 직접 봤다. PCB 조각의 규칙적 배치에서 오는 리듬감, 미세하게 조절한 각도에서 드러나는 입체감, 조명이 비치면 드러나는 문양 등 치밀하게 계산된 아날로그 작품에 태블릿PC를 비추자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흘러나왔다. “내 작업에서 구현되는 것은 어떤 정제된 형태죠. 모든 것이 평등하고 하모니를 이루는 세상을 꿈꿔요.” PCB로 만든 ‘은하수’ 앞에서 김 작가가 활짝 웃었다.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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