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 광복군 김준엽의 독립투쟁, 그 길을 다시 밟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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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엽의 길 3,200㎞/윤영수

<김준엽의 길 3,200㎞>. 맥스미디어 제공 <김준엽의 길 3,200㎞>. 맥스미디어 제공

<김준엽의 길 3,200㎞>은 전 고려대 총장 김준엽, 아니 전 광복군 김준엽(1923~2011)의 독립투쟁 길을 다시 밟은 답사기다. 김준엽은 일본 유학 중이던 1944년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국 쉬저우에서 일본군 진영을 탈출해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까지 2400㎞, 다시 충칭에서 시안까지 800㎞의 여정을 남긴, 그렇다 독립운동가다.

평북 강계군이 고향인 김준엽은 1920년생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조사에서 1923년생으로 밝혀졌다. 그러니까 올해는 그의 탄생 100년을 맞는 해다. 21세 때 목숨 건 대장정을 했던 그는 그의 삶을 통해 ‘역사는 반드시 발전한다’는 것을 끝까지 증명하고자 했다.

전두환 군부독재에 맞서다가 강제 사임 당하던 1985년 고려대 졸업식장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한평생 역사를 공부해온 본인으로서 확인하는 바는 세계사의 전개 과정을 통해 진리와 정의와 선을 마침내는 실현해 나가는 역사의 신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역사의 심판을 모면할 수 없습니다”라고 삼엄하게 말했다. 이는 김준엽이 몸으로 증명한 신념이었고, 현실의 한국현대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지켜보면서도 유지한 온몸의 꼿꼿한 역사관이었다.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이종찬 광복회장은 김준엽을 “대한민국 헌법 전문 첫 문장을 기초한 위대한 역사학자”라고 말한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3·1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것에 기반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김준엽은 1944년 강집되면서부터 탈영해 독립군에 가담하리라 마음먹었다. 입영 열차 안은 떠들썩했다고 한다. 학도병으로 나가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이들이 훨씬 많았는데 공을 세워 금의환향하겠다는 무리들이 군가를 소리 높여 부르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일본군 진영을 탈출하던 김준엽의 순간은 긴박했고, 한 치 앞의 운명을 알 수 없었다. 1944년 3월 말 새벽 2시 그는 일본군 진영을 탈출해서 몇 시간을 달렸다. 강을 건너고자 했으나 불가능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어 강둑을 오가며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내 할 일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 김준엽은 이때를 회상하며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평생의 가훈으로 삼았다. 과연 그는 노란 군복을 입은 중국 군인들에게 붙잡혔다. 죽느냐 사느냐. 그들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잡혀가 처음에는 ‘일본 척후병’이라고 둘러댔으나 싸한 분위기 속에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끝날 거, 솔직히 말하자는 생각을 굳히고 탈영병으로 한국 독립군을 찾아나섰다고 밝혔다. 그들은 친일 괴뢰군으로 위장한 유격대였던 것이다. 살았다.

이후 7월 장준하를 만났고, 그와 평생의 동지가 됐다. 둘은 광복군 국내 진격 작전에 투입됐으나 그들의 조국은 연합군에 의해 해방돼버렸다. 미군정이 들어섰고, 광복군의 귀국 길은 비참했고, 이후 한국현대사도 만만찮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김준엽 묘비에는 ‘그립습니다’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다.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 ‘역사의 신을 믿으라’는 그의 말이 그립다. 김준엽이 그토록 원했던 나라를 우리는 살고 있나. 그토록 믿었던 역사의 신은 분명 그의 도정에 있을 것이다. 윤영수 지음/맥스미디어/304쪽/2만 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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