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형제복지원 국가 책임 인정, 남은 일은 피해자 구제
법원 “중대한 인권 침해 소멸 시효 없다”
국가 차원 진상 규명·손해배상 속도 내야
납치·감금·강제 노역·학대·성폭력 등 끔찍한 인권 유린이 벌어져 ‘한국판 아우슈비츠’로까지 불리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첫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9부(한정석 부장판사)는 21일 이 사건 피해자 26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피고는 원고에게 수용 기간 1년당 8000만 원과 개별 사정을 고려해 필요한 경우 1억 원 범위에서 가산해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1987년 처음 알려진 뒤 한국 현대사의 오점으로 남은 공권력에 의한 인권 유린 사건에 대해 36년 만에 국가 책임을 묻게 된 것이다.
부산시 실태 조사와 피해자 구술집 등에서 드러난 형제복지원의 참혹한 상황은 모든 상식을 초월한다. 피해자들은 열 살 때 친구들과 어울려 서면로터리에 갔다가, 다섯 살 때 영도다리에서 놀다가, 혹은 부산진역에서 오빠를 기다리다가 ‘파출소 아저씨’가 데려다 준다는 말을 듣고 따라나섰다가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고 증언한다. 이들을 강제 수용한 근거는 당시 내무부의 ‘부랑아 단속’ 훈령뿐이었다. 경찰과 행정공무원의 단속으로 형제복지원은 1975년부터 1986년까지 모두 3만 8000여 명을 수용했다. 이들은 무자비한 폭력과 가혹한 노동은 물론 고문과 성폭력에 무차별 노출됐다. 그 과정에 657명이 숨졌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원하는 진상 규명과 책임 있는 조치는 더디기만 했다. 2012년 ‘형제복지원 진상규명법’을 요구하는 피해자의 1인 시위가 시작됐고 8년의 기다림 끝에 202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 개정을 통해 늦었지만 공식적인 진상 규명이 시작됐다. 지난해 8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국가에 의한 부당한 인권 침해’로 공식 인정했다. 이로써 명예 회복과 피해 구제의 물꼬를 트긴 했으나 국가 배상과 같은 후속 조치를 ‘권고’하는 형식에 그치는 바람에 이 사건 당사자뿐만 아니라 지켜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이번 판결은 “신체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당했으므로 국가는 그로 인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분명히 명시한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로써 이 소송 참가자 외의 피해자 구제에도 진일보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소멸 시효가 완성됐다는 정부 주장에 재판부가 “중대한 인권 침해 사건… 소멸 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기각한 것이 주목된다. 반인도적 범죄는 소멸 시효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국제 규범이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진상 규명과 피해 구제에 속도를 내야 한다. 부랑아 딱지가 손가락질로 돌아올까 두려워 피해 사실을 숨기는 이들도 상당수다. 피해자가 납득하는 수준으로 국가가 책임지는 모습과 함께 실효성 있는 구제책을 마련하라. 그것이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대국민 약속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