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살려고 젖은 발로 앞을 향해 걷는 사람들…
이정임 소설집 ‘도망자의 마을’
팍팍하고 어두운 젊음 그려내
병든 엄마 수발, 결혼도 포기
명랑 터치로 ‘밝은 어둠’ 형상
소설가 이정임(42)이 작품에서 삶을 다루는 방식은 특이하다. ‘밝은 터치’로 ‘어두운 실상’을 다룬다. ‘밝은 어둠’이라고 할 만한데, 요컨대 삶의 고달픔을 ‘특유의 명랑성’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소설이 품은 묘한 매력이요, 문제적 지점이다.
8년 만에 나온 그의 두 번째 소설집 <도망자의 마을>(걷는사람)은 답답하고 심각한 우리 사회의 초상을 보여준다. 2024년 우리 사회 30~40대 젊음의 초상이 어둡다. 객관적으로 젊음의 희망과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도망가기 위해 지어진 이 마을은 사람이 있지만 산다고 말할 수 없다.” 너무 암울하지 않은가. 그래서 ‘밝은 어둠’의 전략을 택한다. ‘도망자의 마을’은 “그래도 살아보려고 젖은 발로도 앞을 향해 걷는 사람이 머무는 마을”이란다.
소설집에는 단편 일곱 편이 들어 있는데 결혼 적령기를 넘긴 작품 중심인물들은 거의 외톨이이며,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경우가 없다. 단편 ‘벽, 난로’에서처럼 심지어 희한하게(?) 여자 둘만 같이 사는 경우도 있다. 친구 사이인 둘은 서울에서 자의·타의로 실직한 뒤 부산 산복도로로 흘러들었다. 이들은 ‘남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무직 비혼주의자다. 요즘 세상에서 ‘내 집 갖기’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내 인생이 빚지는 걸로 최적화된 삶’이란 게 그들의 씁쓸한 자조다.
그러니까 그의 소설은 세계 최저를 기록한 0.7대의 합계출산율이 더욱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우리 사회의 안쪽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과연 소설 주인공들의 삶은 팍팍하다. 그들은 변변찮은 학원 강사, 글쓰기 강사, 프리랜서, 아니면 무직이다. 그런데 그들은 ‘엄마의 병’ 수발로 삶의 무거운 짐을 더 짊어지고 있다. 단편 ‘비로소, 사람’에서 홀로 사는 30세 딸 ‘이선’은 월급 60퍼센트 이상을, 옷 수선 가게를 했던 치매 엄마의 병원비로 대는 ‘돈 내는 죄인’ 꼴이다. 단편 ‘오르내리’에서 ‘나’는 스무 살 이후 이런저런 강사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외톨이인데, 파킨슨병에 치매로 8~9년째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 엄마 뒤치다꺼리에 힘겹다. ‘뽑기의 달인’에서도 ‘이수안’은 혈액투석하는 엄마를 돌보는데, 그는 낙향하고 비혼을 선언해 엄마에게는 ‘뽑기의 꽝’ 같은 존재다.
단편 ‘점점 작아지는’에서 35세의 ‘호양’은 그나마 10년 넘게 직장을 다니지만, 그 또한 일에 치여 대상포진에 안면마비까지 겹치는 고통을 치르고 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비겁하게 지내고 있다’든지 ‘울고 싶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주 울었다’는 것이 삶이 버거운 이들의 공통된 심사다.
단편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를 보면 1980년대에서 1990년대 문턱을 넘어서던 즈음, 부산 연지동(소설가는 어릴 적 이곳에서 컸다) 단칸방 동네에선 ‘여자들의 도망치기 역사’가 유구했다고 한다. ‘곗돈을 들고 도망가고, 불륜을 저질렀다고 도망가고, 노름판에 빠져서 도망가고…’.
2010~2020년대 현재는 이전의 도망치기 역사와 다르다. 이제는 도망칠 곳도 없기 때문인지 우리 사회의 많은 모퉁이들은 아예 ‘도망자의 마을’ 같다는 것이다. 단편 ‘도망자의 마을’에서 사람들 내면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것이 ‘거짓말의 표정’이다. 그 표정은 남을 속이지만, 결국 자신마저 속이는 것이다.
그러나 어둠을 밝음으로 바꾸는 명랑성, 웃음, 찡함, 요컨대 ‘특유의 예술적 능력’이 이정임 소설의 매력이다. ‘비로소 사람’에서 길냥이 돌보기를 통해 마음의 위로를 받은 딸과, 치매 엄마가 요양병원에서 마늘을 까는 장면의 대화가 유쾌하다. 엄마가 사람들에게 “마늘 장아찌 해주겠다”며 모처럼 의욕을 보이자 딸이 반가워서 피식 웃는다. 엄마가 묻는다. “와 웃노?” 그러자 딸이 “좋아서. 우리 둘 다 사람 같고 좋네.”라고 말한다. 엄마가 하는 말. “지랄하고 자빠졌네. 좋을 것도 쌔고 쌨네.” 마늘 까면서 ‘사람이 돼 간다’는 것은 신화적 상징이고, 그걸 후려치는 ‘자빠졌네’는 통쾌한 웃음으로 이어진다. 그 웃음이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희망의 한 쪽이라는 것이다.
‘오르내리’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아들딸을 다 잃은 ‘흰머리 할매’와 병원에 있는 ‘치매 엄마’가 서로 반갑다며 영상 통화를 하는데, 딸인 ‘나’도 옆에서 치매 엄마에게 “얼른 나아서 봅시다. 어? 힘내자!”라고 말한다. ‘낫자는 말에 엄마가 희미하게 웃’으며 뜻밖에도 “알겠다!”라고 답하는 것이다. 딸은 ‘그 대답을 듣는데 왈칵, 눈물이 난다’고 한다. 비록 이뤄질 수 없다고 해도, 그게 사람이 나눌 수 있는 마음이고, 희망이라는 것이다.
이정임 소설가가 끝까지 붙들고 있는 희망은 ‘우리 안의 어떤 파괴 불가능한 것’이고, 인간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바로 그것일 터이다. 표지 그림은 남편인 소설가 임성용의 판화라고 한다. 소설가는 2016년부터 부산 동구 수정5동 산복도로에서 살고 있다.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