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허망한 드라마 세트장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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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별다른 감흥도 없던 장소가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면 꽤 달리 보인다. 자기가 알던 그곳이 맞는지 언뜻 헷갈릴 만큼 다가오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유명 배우의 연기 명장면이 촬영된 곳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영상물의 마력이라고 할까. 그 드라마나 영화의 팬들이라면 꼭 가봐야 할 ‘성지’가 된다.

2002년 1월 14일부터 20부작으로 방영된 배용준, 최지우 주연의 멜로드라마 ‘겨울 연가’를 모르는 중년층은 잘 없을 것이다.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드라마 촬영지였던 강원도 춘천의 남이섬은 그야말로 일본 팬들의 성지로 떠올랐다. 국내에선 인기 드라마 한 편의 경제·문화적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하는 계기가 됐다.

멋지고 아름다운 자연물만 그런 게 아니다. 드라마 속 강렬했던 인상이 남아 있는 세트장도 얼마 동안 팬들의 높은 관심을 받는다. 2000년 KBS 역사드라마 ‘태조 왕건’의 촬영지였던 경북 문경시는 야외 세트장의 가능성에 눈을 뜬 대표적인 지자체다. 당시 공사비 32억 원이 투입돼 기와집과 초가집 등 건물 90여 동이 들어선 문경의 세트장은 드라마 종영 이후 3년간 관광객 470만 명이 다녀가며 국내에 ‘드라마 세트장 관광시대’를 열었다.

문경 세트장의 대박은 다른 지자체들의 부러움과 함께 경쟁심을 자극했다. 특유의 냄비근성까지 발동하면서 너도나도 드라마 세트장 유치에 나섰다. 인기 드라마 한 편이 종영되면 어디선가 또 세트장 한 곳이 관광지가 됐다. 관광객 유치를 실적으로 삼으려는 지자체장의 욕심도 한몫 거들었다.

그러나 무턱댄 욕심엔 그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면밀한 계획도 없이 드라마의 인기만 덜렁 믿고 예산까지 쪼개 조성했던 드라마 세트장은 결국 골칫거리로 변했다. 이런 데가 전국에 한두 곳이 아니라고 하니 분수를 넘은 욕심의 대가를 온 나라가 치르는 셈이다. 관심이 사라진 드라마의 세트장은 오래전부터 관광지는커녕 애물단지로 변했다.

해돋이로 유명한 울산 간절곶공원에 세워진 드라마 세트장도 꼭 그 짝이다. 2010년 조성된 이 세트장은 15년간 43억 원의 혈세만 집어삼키고 결국 예산 낭비라는 오명만 남기고 최근 철거됐다고 한다. 짓기만 하면 관광객이 몰릴 것이라고 여겼던 드라마 세트장이 수십억 원을 날리고서야 뒤늦게 빛 좋은 개살구임을 안 것이다. 간절곶 세트장이 헐린 뒤 탁 트인 풍경이 시원스럽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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