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문학 찾아 떠돈 40년 항적] ‘귀두 도장’ 찍는 기지 발휘해 구사일생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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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해사 2기생 추석 연판장 사건
해군사관학교 초창기 좌익들 설쳐
상관 살해하거나 함정 납북도 많아
연서 돌 때 인장 대신 거시기 도장
덕분에 처형되지 않고 위기 모면

지난해 경남 창원시 진해구 해군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열린 제81기 해사 생도 입학식. 해군 제공 지난해 경남 창원시 진해구 해군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열린 제81기 해사 생도 입학식. 해군 제공

해군사관학교 1기생은 1946년 2월 8일부터 3월 18일까지 3차에 걸쳐서 총 113명이 입교하여 1947년 2월 7일 61명이 졸업했다. 2기생은 1기생이 졸업한 2월 7일 오후에 86명이 입교하여 1948년 12월 15일에 48명이 졸업했다. 3기생은 1947년 9월 2일에 136명이 입교하여 1950년 2월 25일에 54명이 졸업했다. 1~3기의 교육 기간이 1년, 1년 10개월, 2년 6개월로 제각각이었던 것은 정부 수립 이전에 간부 인력이 시급하게 필요하여 애초 계획한 3년 교육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들쭉날쭉 임관시켰던 사정 때문이다. 1기, 2기, 3기에서 이렇게 입학생 대비 졸업생 비율이 낮은 것은 교칙이 엄해 성적 불량, 적성 불량, 교칙 위반 등의 벌칙으로 퇴교를 당하는 생도들도 많았지만 더 큰 이유는 좌익 프락치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생도들 간에 좌우 사상 대립이 얼마나 심했는지 밤중에 실종된 생도가 날이 새면 변기통에 거꾸로 처박혀 시체가 되어 발견될 정도였다. 대부분 좌익 프락치들의 소행이었다.


지난 2020년 해군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열린 제128기 학사사관 해군·해병대 소위 임관식에서 신임 장교들이 정모를 던지며 임관을 축하하는 모습. 해군 제공 지난 2020년 해군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열린 제128기 학사사관 해군·해병대 소위 임관식에서 신임 장교들이 정모를 던지며 임관을 축하하는 모습. 해군 제공

교관 중에서도 좌익 프락치가 있었다. 학과목 교육 중에도 은근히 공산주의 사상을 선동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북한에서 공산주의가 싫어 월남해 제일 안전한 곳인 줄 알고 사관학교에 들어왔는데 여기도 있을 곳이 못 되구나!’하고 탄식하며 자퇴하는 생도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학교 당국에서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좌우 대립으로 워낙 혼란한 시국이라 적색분자를 색출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좌익 프락치는 2기생 가운데 제일 많았는데 그 증거는 곧 현실로 드러났다. 2기생은 해사 역대 기수 중 가장 적은 인원인 48명이 졸업했는데 졸업 후에도 함정 납북 또는 미수죄로 10명이나 검거되는 불명예를 짊어져야 했다. 2기생 좌익 프락치들은 졸업 후 소위 계급장을 달고 함정에 배치되자마자 남로당의 지령을 받아 상관을 살해하고 함정을 납북하는 등 끔찍한 짓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명령을 받은 남로당은 해군 좌익 승조원들에게 1948년 5월 10일 남한의 총선거를 전후하여 함정 납북을 지령했다. 지령을 받은 좌익 승조원들은 그해 5월 7일 JMS –311 통천정을, 5월 15일에는 YMS-517 고원정을 북으로 몰고 갔다. 1949년 5월 11일, 해사 2기생인 YMS-508 강화정 부장 이송학 소위는 좌익 승조원들과 결탁하여 정장 이기종(해사 1기) 소령과 훈련대 사령 황운서(특임) 중령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함정을 원산으로 몰고 갔다.


한국전쟁 당시 해군함정인 백두산함. 1950년 6월 25일 600여 명의 무장 병력을 싣고 침투하던 북한의 1000t급 무장수송선을 격침시킨 전적이 있다. 연합뉴스 한국전쟁 당시 해군함정인 백두산함. 1950년 6월 25일 600여 명의 무장 병력을 싣고 침투하던 북한의 1000t급 무장수송선을 격침시킨 전적이 있다. 연합뉴스

1949년 5월 서운걸(해사 2기) 소위는 부산 3부두에 정박하고 있던 JMS-302 통영정(정장 공정식 대위)을 납북하려다 승조원들의 반발로 미수에 거쳤다. JMS-307 단천정, 301 대전정도 좌익 승조원들에 의해 납북될 뻔했으나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났다. 같은 해 5~6월 사이에 PG-313 충무공정, JMS-305 두만강·307 단천정, YMS-502 경주·505 김해·506 강계·510 강경정 등 무려 7척의 부장들이 모의하여 집단으로 함정을 납북하려다 사전에 적발 검거되었다. 여기에 가담한 부장들은 대부분 2기 출신 좌익들이었다. 1962년 4월 28일, 동해 해상에서 경비 중이던 PC-707 오대산함에서 납북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01시 45분경 좌익 프락치로 해군에 입대해 기회를 노리고 있던 수병 최방순이 권총을 들고 조타실에 난입하여 침로를 북으로 돌리라고 협박했다. 이를 제지하던 과정에서 부장 최성모(해사 9기) 대위는 복부 관통상을 입고 즉사하고 3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범인 최방순은 납북에 실패하자 권총으로 자살했다.

나는 NROTC 17기로 1972년 2월 25일 해군 소위로 임관하여 2년 동안 호위구축함인 DE-73 충남함 보수관으로 근무했다. 제대 후 외항선을 타면서 싱가포르에서 해사 2기생인 고 박무호 사장을 만나게 되었다. 박 사장은 대령으로 예편한 후 이민을 가서 1970~1990년 싱가포르에서 선식업을 경영했다. 고객들은 주로 해사 출신 선장들이었다. 고 박무호 대령은 평양일고 출신으로 젊었을 때는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함명수 제독과 냉면 대접에 소주를 가득 부어 마실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지만 별은 달지 못했다.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해군사관학교 앞 해상에서 전투수영 훈련을 하는 모습. 해군 제공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해군사관학교 앞 해상에서 전투수영 훈련을 하는 모습. 해군 제공

해사 2기생들의 추석 연판장 사건은 고 박무호 대령한테서 직접 들은 이야기다. 추석이 되었는데 고향이 먼 생도들은 외출을 나가도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었다. 학교 급식은 부실했고 배가 고프니 고향 생각이 간절했다. 특히 이북 출신 생도들이 더 외롭고 쓸쓸했다. 어느 진해 출신 생도가 그런 동기생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평양이 고향인 박무호 생도도 초대를 받았다. 진해 생도의 집은 진해시 여좌동에 있었다. 다다미가 깔린 일본식 가옥 2층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생도들은 저마다 조국의 앞날을 걱정했다. 의도했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어느 생도가 일어나서 이런 제안을 했다. “동기생 여러분,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리들의 결의를 다짐하기 위하여 이 종이에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읍시다!”


금정산 남근석 모습. 부산일보 DB 금정산 남근석 모습. 부산일보 DB

그러자 몇몇 생도가 “옳소! 찬성이요!” 하면서 박수를 짝짝 쳤다. 아무런 반대 없이 연판장이 돌기 시작했다. 박무호 생도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평양에서 공산당원들이 궐기대회를 할 때 하던 분위기와 흡사했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반대는 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언제 목이 졸려 변기통에 거꾸로 처박힐지 알 수 없었다. 연판장이 돌고 돌아 박무호 생도 앞에 왔다. 박무호 생도는 연판장에 이름도 쓰지 않고 허리띠를 풀고 훌러덩 바지를 내렸다. 그러고는 껄껄 웃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야, 사내자식들이 손도장이 다 뭐냐! 남자는 거시기 도장보다 확실한 게 어딨어. 나는 거시기 도장을 찍겠어!” 박무호 생도는 ‘털방망이’를 꺼내 귀두에 인주를 벌겋게 묻혀 연판장에 꾹 눌렀다. 그 꼴을 보고 멋모르는 생도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좌익 프락치들은 속으로 이를 갈아붙였겠지만 그 후 다른 위해는 없었다. 박무호 생도가 그날의 모임에 대해 함구했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흘러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함정 납북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자 뒤늦게 사상 검열이 엄격해졌다. 그날 연판장에 서명을 하고 인장을 찍었던 대부분의 동기생들은 이미 이적 죄를 지어 처형되거나 예비검속을 당해 군복을 벗었다. 사관학교 동창회 명부에는 ‘전사’라는 기록만 있을 뿐 어느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기록도 없다. 그러나 박무호 생도는 별은 달지 못했지만 대령까지 진급했다. 지문(指紋)도 없는 털방망이 도장이 박무호를 살려주었던 것이다. 글/ 김종찬 해양소설가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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