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한 칸의 푸르름을 채워나간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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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까지 스페이스 토핑서
박형진 작가 ‘개나리 동산’전
색점으로 표현한 풍경화
자연의 색에서 생동감 느껴

박형진 ‘오동나무’. 스페이스 토핑 제공 박형진 ‘오동나무’. 스페이스 토핑 제공

‘빛이 비치면 반짝이는 잎 색’ ‘해가 지는 때 깊어진 잎 색’ ‘비 온 뒤 잎 색’ ‘광합성을 많이 한 촘촘한 초록’ ‘여름 초록’ ‘어둠이 다가올 때 초록’ ‘시원한 초록’ ‘개구리를 생각나게 하는 촉촉한 색’ ‘비 오는 날 비 내음이 나는 색’….

박형진 작가가 발견한 나무의 초록은 다양하다. 시간에 따라,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초록은 매번 달랐다. 작가는 자신이 발견한 수백 가지 초록을 매일 모눈종이 딱 한 칸씩 물감으로 기록했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나무의 색이 얼마나 다양한지 표현해 보고 싶었단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모눈종이에 물감의 색점을 기록했다. 이 작업은 단순히 색상표를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계절의 변화, 시간의 변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동시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장 가깝게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단일한 장면으로 완결되는 회화는 아니지만, 박형진의 색점 회화는 온전한 풍경화이다. 한 칸씩 균등하게 나눠진 푸르름은 가볍게 튀며 풍경의 인상을 제대로 가져온다. 눈부신 5월의 햇살을 받아 빛나던 초록도, 비 내린 오후 청량하고 시원했던 녹음도,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시간의 인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박형진 ‘개나리’. 스페이스 토핑 제공 박형진 ‘개나리’. 스페이스 토핑 제공
박형진 ‘두둠칫’. 스페이스 토핑 제공 박형진 ‘두둠칫’. 스페이스 토핑 제공

박형진 ‘개나리’. 스페이스 토핑 제공 박형진 ‘개나리’. 스페이스 토핑 제공

기계적으로 구분된 모눈종이의 색점은 자칫 디지털 정보 코드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박 작가의 색점 작품은 다정다감한 느낌이 오히려 돋보인다. 자연에서 느끼는 빛, 온도, 대기, 습도, 그날의 감정까지 공감각적인 경험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모눈종이 작은 한 칸을 찍기 위해 작가는 그 날 하루 수많은 실험과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한다. 그날, 그시간의 색을 온전히 표현하기 위해 스스로 색을 만들어야 했다. 조색한 색을 체계화한 색채표까지 만들었고, 이 색채표는 ‘초록해설’이라는 별도의 드로잉 작품으로 전시되며 관심을 끌기도 했다.

한국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작은 색점이지만 서양화의 붓질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종이에 스며드는 느낌과 무심히 건드린 붓의 움직임이 자연의 느낌과 더 닮아있는 것 같다.

사실 작가의 모눈종이 색점 작업은 과거 작가가 했던 작품과 맥이 닿아있다. 작가는 자연의 땅이 제도 속에서 특정한 사회적 의미를 갖는 영역으로 규정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자연 그대로의 땅이 소유권, 개발 논리 등 인공적 제도에 의해 종속되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소유권 문제에 얽힌 지역들의 모습을 연작으로 보여주었다. 모눈종이 색점 작업도 모눈종이가 땅을 측량 가능한 범위로 영역화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계속된 관심이 나온 결과인 셈이다.

박형진 ‘오동나무’. 스페이스 토핑 제공 박형진 ‘오동나무’. 스페이스 토핑 제공

최근 작가는 모눈종이 색점작업을 좀 더 풍성한 색감을 내는 대형 한지 작업으로 확장했다. 건축용 먹선을 튀기는 방식으로 한지 위에 그리드를 설정하고 그 안을 매일 색점으로 채우고 있다. 모눈종이 색점은 노란빛이 가득한 개나리가 많았다면 한지 색점은 오동나무 시리즈가 이어지고 있다.

스페이스 토핑의 개관전으로 준비된 박형진의 ‘개나리 동산’ 전시는 부산에서 처음 열리는 박 작가의 개인전이다. 개나리의 변화를 볼 수 있는 56개 회화 연작을 비롯해 80호 크기의 오동나무 한지 연작도 만날 수 있다.

“매일 한 칸의 푸르름을 채워나간다”는 작가의 말을 들으며, 문득 색점이 우리의 삶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 똑같아 보이는 하루지만, 색점의 수 많은 초록처럼 우리 삶 역시 다른 하루로 채워나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노랑으로, 초록으로 빛나는 작가의 색점 작품은 봄의 중간으로 가는 지금 계절과 잘 어울린다. 전시는 13일까지 열린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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