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엔 캠퍼스 커플, 지금은 복지관 커플’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1회 ‘어르신 짧은 시 공모전’
98세 응모 등 5800편 몰려
‘살아 있다는 것이 봄날’ 출간



우수상을 받은 김남희 씨(74)의 시 ‘봄맞이’에 김우현 작가가 그린 삽화. 문학세계사 제공 우수상을 받은 김남희 씨(74)의 시 ‘봄맞이’에 김우현 작가가 그린 삽화. 문학세계사 제공

‘할배가 안경을 찾아서/ 여기저기서 돌고 있는데// 네 살 손녀가 찾아주었다// 할배 손에 있다고.’ 부산 사하구 하단동 천봉근 씨(73)가 쓴 시 ‘잃은 안경’이다. 한국시인협회와 대한노인회가 공동 주최한 제1회 ‘어르신의 재치와 유머 짧은 시 공모전’에서 발굴된 재기 넘치는 시들을 엮은 시집 <살아 있다는 것이 봄날>이 출간됐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지난달 중순까지 한 달간 진행된 이번 공모전에는 최고령인 98세 응모자를 포함해 접수된 시가 5800편이 넘었다. 예심에서 100편을 골라 김종해·나태주·유자효 시인이 이 중 12편을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아내의 닳은 손등을/ 오긋이 쥐고 걸었다/ 옛날엔 캠퍼스 커플/ 지금은 복지관 커플.’ 부부간의 정과 노년의 삶을 긍정하는 태도가 잘 담긴 대구시 북구 태전동 성백광 씨(63)가 쓴 ‘동행’이 대상작이다. ‘죽음의 길은 멀고도 가깝다/ 어머니보다 오래 살아야 하는 나를 돌아본다/ 아! 살아 있다는 것이 봄날.’ 최우수상을 수상한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김행선(70) 씨의 ‘봄날’에서 이 책의 제목을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 부산시 연제구 연산동 윤상철 씨(75)는 ‘잘 있냐 하기에/ 그렇다고 했다/ 얼굴 한번 보자길래/ 그러자고 했다/ 가을 산 깊어지기 전에/ 함께 보자고 했다’라며 ‘안부’를 전한다.


우수상을 받은 정인숙 씨(65)의 시 ‘로맨스 그레이’에 김우현 작가가 그린 삽화. 문학세계사 제공 우수상을 받은 정인숙 씨(65)의 시 ‘로맨스 그레이’에 김우현 작가가 그린 삽화. 문학세계사 제공

노인들의 시에는 정곡을 때리는 유머, 창의적인 촌철살인의 비유와 재치, 독자에게 웃음과 행복을 주는 압축된 농담과 삶의 지혜가 담긴 작품이 많았다. 경기도 하남시 신장동 양종술 씨(77)가 쓴 ‘로또’ 같은 시가 대표적이다. ‘돼지 꿈꾸었다는 마나님 앞세우고/ 로또복권 사러 가는 길에서/ 1등 당첨되면 십일조 헌금하자고 합의했는데/ 그 십일조가 세전 10%냐, 세후 10%냐/ 옥신각신하다가/ 복권은 못 사고 막걸리만 한 통 사 가지고 돌아왔다.’ 오늘은 왠지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동 신동고 씨(75) 가 쓴 ‘최고의 당’이 눈에 들어온다. ‘이 당 저 당 다 있어도/ 경로당이 최고입니다.’

이 책에는 본심에 오른 100편의 작품이 실렸다. 인공지능(AI)으로 생성한 이미지를 김우현 작가가 리터칭해 보정한 삽화도 함께 수록됐다. 유자효 시인은 “노인들의 시는 젊은이들이 도저히 갖지 못하는 강점이 있다. 그것은 시간이 주는 경험이라는 보고이다. 이런 자산을 바탕으로 활발한 시작 활동을 하는 노인들은 우리 시단의 새로운 경향이자 자산이 되고 있다”고 공모전 심사 소감을 밝혔다.


<살아 있다는 것이 봄날> 표지. <살아 있다는 것이 봄날> 표지.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