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퇴계, 향산, 양산
지난 총선 때 한 후보가 자신의 저서 중 퇴계 이황의 사생활 관련 표현이 문제가 돼 곤욕을 치렀다. “감히 퇴계를 모독하느냐”며 유림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공맹에 견줘 이자(李子)로 칭송되는 성인을 폄훼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기실 퇴계가 대학자이자 민족의 사표라는 데 이론을 달 이는 별로 없다. 더구나 그는 매서운 절의(節義)를 가진 선비이기도 했다. 초야에서 정진하며 후진을 양성한 은인(隱忍)의 학자로 흔히 알지만, 이는 퇴계의 절반만 아는 것이다.
그의 본래면목이 잘 드러난 시가 ‘절죽(折竹·꺾인 대나무)’이다. ‘강항오조좌(强項誤遭挫·굳센 목덜미가 잘못 꺾어져도)/ 정심비소파(貞心非所破·곧은 마음이 깨지는 것은 아니어라)/ 늠연립불요(凜然立不撓·늠름히 서서 흔들리지 않으니)/ 유감격퇴나(猶堪激頹懦·오히려 무너지고 나약한 자를 격려한다네).’ 퇴계가 63세 때 지은 이 시에는 어떤 어려움에도 절의를 지킨다는 선비의 의연한 기상이 갈무리돼 있다.
퇴계의 절의는 대를 이어 전해졌고, 그 절정이 11세손 향산 이만도(1842~1910)다. 어려서 퇴계학을 전수받은 향산은 평소 선비로서 뜻 세움을 중히 여겼다. “뜻을 세우는 건 가슴에 대못 박는 것과 같아서 한 순간이라도 흔들려선 안 된다”는 게 그의 소신이었다. 그의 부친도 마찬가지여서, 향산이 25세에 장원급제하자 “조정이 너를 죽을 자리에 두면 반드시 죽음으로써 선비의 책임을 다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자 향산은 고향 안동으로 돌아가, 퇴계가 그랬던 것처럼, 후학 양성과 학문에 몰두했다. 이후 일제의 침략에 저항해 의병을 일으켰던 그는, 1910년 한일병탄이 발표되자 “죽음 말고 무엇이겠는가”라며 24일간의 단식 끝에 순절했다. 안타깝게도 향산의 순절은 당시는 물론 해방 이후에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향산이 선비로서 보여준 삶과 죽음은 망국지경에서 지식인의 선택과 결단이 어떠해야 하는지 숙고하게 만든다. 그의 자취를 좇아볼 법도 한데, 마침 양산시립박물관에 좋은 기회가 마련됐다. 26일부터 7월 21일까지 열리는 ‘양산군수 특별전’이다. 조선시대 양산에 부임해 칭송받은 역대 군수들의 면모를 소개하는 전시인데, 대상에 향산이 포함됐다. 향산은 1876년 양산에 부임해 목민의 의무를 다했다. 전시를 찾는다면 향산의 절의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성싶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